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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Aug 01. 2020

나의 언니

1남1녀 중 장녀인 나에게도 언니가 있다. 3녀 중 막내인 그 언니는 나의 종사촌언니이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은 맞벌이셨다. 당시는 유치원도 좀 커서 다녔던 터라 5세전후의 나를 늘 어딘가에 맡겨야 했는데, 어린 나는 매일 아침, 누군가의 집으로 나를 데려다주러 가던 아빠의 차안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오늘 외할머니집에 가? 언니집에 가?" 나는 늘 외할머니집이 아닌 언니네 집에 가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언니네 집으로 매일 나를 데려다 주지 않고 왜 외할머니집에를 더 많이 데려다주는지 그땐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시누이집에 어린 딸을 매번 맡길 수 없었을 엄마를.


여튼 엄마 없이도 즐겁게 놀 수 있었던 언니집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에 선하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좁고 삐뚫한 계단을 오르면 작은 옥상도 있었다.  명의 언니들이 쓰는 방에는 갖가지 인형들이 엄청 많았고 아기자기한 장식품도 아주 많았다. 하루종일 구경해도 즐거울 것만 같던 방이었다.

작은 마당에서 나는 비눗방울 액체 만드는 법에 대해 오줌을 꼭 넣어야한다는 언니의 말을 오랫동안 철썩같이 믿었고(내가 너무 자주 비눗방울을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 귀찮았던 언니는 더러운 오줌이 들어가야 한다고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언니인형들을 가지고 놀 때에 "내 남자(인형) 어딨어?"라는 앙칼진 내 말에 어른들이 아주 크게 웃었는데, 나는 그들이 왜 웃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따라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고, 옥상에서는 난간에 앉아 언니가 만들어준 출석부로 (지금 정말 선생님이 된 둘이) 선생님 놀이를 했던 그 날들이 눈에 선하다. 언니는 늘 먼저 인형을 골랐지만 이상하게 나는 언니가 고르고 남은 인형이 늘 더 마음에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언니가 나를 배려해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커서 학교에 가게 되고, 그 언니와는 방학이면 시골 친할머니댁엘 가서 함께 며칠을 지냈다. 시골 개울가에서 함께 수영을 했고, 할머니 몰래 성냥을 피워 불장난을 했고, 할머니가 우리를 위해 닭을 잡아주셨을 때 할머니가 닭을 죽이는 모습에 분개해 절대로 그 닭죽을 먹지 않겠다고 함께 결의하기도 했다.

잠이 많은 나는 늘 언니보다 먼저 잠들었고 더 늦게 일어났다. 내가 잠들어 할일이 없던 언니는 밤새 예쁜 종이인형들을 만들어 놓았고, 나는 자고일어나면 뚝딱 새로 만들어져있는 예쁜 종이인형들에 신이 났다.

시골에서 하염없이 걷다보니 너무 멀리 가기도 했던 어느날, 언니와 나는 경운기를 히치하이킹해서 타고 왔다. 먼훗날 언니는 자신이 언니인데 어쩔 줄 몰라하는동안, 동생인 내가 대담하게 히치하이킹을 해서 참 멋졌다고 나를 추켜세워주었다. 그렇게 보드랍고 자상한 언니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자주 함께 보냈지만, 학창시절은 둘다 공부하기에 바빴으므로 공유할 추억이 거의 없이 멀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할 인연인가 보다.

언니는 두번이나 대학교를 바꿔 다니더니 결국 나와 같은 대학교의 같은 단대를 입학했다. 물론 언니가 먼저였다. 세살 차이나는 언니가 한 학번 더 먼저 입학했으니, 내가 언니를 따라 갔다는 말이 맞겠다. 수능을 망친 나는 담임선생님이 써주신대로 원서를 낸 것인데 합격했고, 언니와 같은 대라는 사실알고 기쁘게 입학 기억이 난다.

3월 입학 전 2월에 예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단대끼리 엠티를 갔을 때, 나는 우리 언니가 같은 단대 다른 과에 다닌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내가 장기자랑할 때 언니과 사람들이 더 우리를 환호해줄 정도였다. 언니네 과 사람들은 나를 언니의 동생으로 알아봤다. 심지어 내가 학교 앞  편의점에서 일할때 언니네 과 사람들이(언니와 친한 일부의 사람들) 우리 편의점의 매상을 올려주려고 특별히 자주 방문할 정도였다. 그 대학의 캠퍼스 곳곳에서 언니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웃느라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정도로 까르르했었다. 그렇게 대학에서 다시 만난 언니는 나에게 이전보다 더 소중하고 든든한 언니가 되었다.


언니는 나보다 먼저 임용고시를 봤는데, 도서관에서 기운 없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러웠고 곧 닥칠 나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몸이 약한 언니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했고, 나는 저러다 사람잡겠다하는 마음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언니가 그 힘든 시험에 단번에 합격했다.

그리고 언니는 자신이 쓰던 독서대를 나에게 선물해주며 너도 똑같이 한번에 합격할 것이라고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언니처럼 한번에 합격했다. 절대 그 시험은 쉬운 시험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한번에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부분 언니 덕분이다. 언니가 했기에 언니 동생인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의 힘이 컸다. 그 시험의 합격소식도 언니가 먼저 발견하고 내게 연락해주었다. 그 시험의 합격을 마치 언니가 시켜준 기분이었다.


언니라는 그 이름 그대로, 언니는 인생의 모든 과제들을 다 나보다 앞서 수행해냈다. 그 과정에서 언니가 겪는 고통들을 내가 다 봐왔다. 그 덕분에 나는 좀더 편하게 인생의 과제들과 고통들에 대면할 수 있었다. 언니가 결혼과정에서 언니의 엄마와 겪었던 갈등(부모의 반대)을 나 역시도 그 나이대에 똑같이 겪었으며, 언니가 결혼선배로서 해준 조언들 덕분에 나는 보다 갈등이 적 결혼상대를 골라 결혼할 수 있었다. 언니는 늘 나의 남편을 칭찬한다. 내가 육아가 힘들어 언니에게 전화를 하면, 언니는 늘  "내가 다~안다. 그 마음 무슨 마음인지 다~안다."하는 말로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내가 첫아이를 임신하고 너무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 마침 언니가 우리 아파트 앞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후 거의 매일 언니집에 가서 밥을 얻어 먹었다. 이상하게 우리집에선 밥만 보면 그렇게 구역질이 나던 게 언니집에 가서 먹는 밥은 술술 넘어갔다. 당시 5세 2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언니는 내 밥까지 해주면서, 나한테 싫은 내색은커녕 밥 잘 먹어줘서 고맙다고만 했다.


내가 둘째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으려고 입원하던 그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

남편은 첫째와 집에서 자고, 밤 열한시에 나 홀로 운전해서 캐리어를 끌고 병실에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확 몰려왔던 그밤, 내일이면 수술대에 오를 두려움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몫이던 그 밤. 카톡이 왔다.

"입원 잘했니?"

잘 도착했냐는 신랑의 카톡이 왔는지 아닌지는 지금 기억도 안 난다. 그 밤, 나의 입원을, 나의 두려운 마음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언니의 그 문자에 나는 눈물이 났다. 한참을 언니와 톡을 주고 받으며 외로운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를 출산하고 단 하루의 휴가를 쓸 수 있었던 남편은 내가 제왕절개수술을 한 다음날부터 출근을 했고, 친정엄마는 첫째를 봐야해서 올 수 없었던 그 날, 언니가 찾아왔다. 나는 씩씩하게 두번째라서 잘할 수 있다고 모두에게 말했지만, 실은 혼자 앉기도 힘든 날이었다. 그날 나를 찾아온 언니는 퉁퉁부은 얼굴로 혼자 엉거주춤 있는 나를 보며 울었다. 오자마자 아무말도 안하고 울기부터 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언니는 나에게 씩씩하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고, 나도 할만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우린 둘다 알고 있었다.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그걸 남편도 친정엄마도 몰라주는 것 같았는데, 언니만은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안했다. 내가 동생이라서, 나는 언니의 마음을 늘 몰랐다.

언니가 첫아이를 낳고 조리원에 있을 때 내가 언니를 방문했을 때 언니는 나를 보고 울었다. 산후우울증이란 단어조차 몰랐던 나는, 왜 예쁜 아기를 낳아놓고 우느냐고 언니를 책망했다. 언니가 첫 아이를 낳고 많이도 힘들어할 때, 나는 언니에게 왜 이렇게 예쁜 아기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또 책망했다. 언니가 고무장갑도 못 끼고 설거지할 때, 바빠도 고무장갑 끼라고 여자는 언제나 가꿔야한다는 망언도 했었다.

나는 늘 못 겪어서 모른다는 이유로 언니를 위로하지 못했는데, 언니는 늘 먼저 겪어 다 안다는 이유로 나를 위로했다.


내가 언니에게 해준 걸 떠올려보자니 정말 미미하다.

언니가 타이타닉 포스터 액자 두 개 얻게되어 하나는 언니가 하고 하나는 나를 주려고 했는데, 고모가 실수로 언니가 하겠다고 한 포스터를 내게 갖다줘버렸다. 그 후 고모는 언니가 울었다고 별것도 아닌 걸로 운다고 나에게 언니를 흉봤는데, 나는  방에 걸려있던 그 포스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언니가 갖고 싶은 걸 내가 가져서, 그 포스터를 볼 때마다 언니에게 미안했다.

언니의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서 나는 언니들과 비슷하게 서럽게 울었다. 내가 서러웠던 건, 사실 안하지만 게도 추억이 많았던 나의 고모부가 돌아가셔서 슬펐던 게 아니라, 내 언니들이 서러운 것이 서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를 정말로 좋아했다.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게, 처음부터 그냥 언니를 좋아했다. 내가 언니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했던 것.. 그게 내가 언니에게 해준 전부인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언니에게 신세를 지고 왔다.

늘 언니네 집에 놀러가면, 언니는 내 아들들을 봐주느라 고생한다. 언니의 딸과 아들도 함께 내 아들 둘을 봐주느라 고생한다.

그렇게 고생시키고 가는 길에 언니는 늘 나에게, 내가 다 들지도 못해서 늘 언니가 차에까지 갖다줘야 할만큼 많은 것들을 준다.

그렇게 내가 들지도 못할 많은 것들을 받아서 나는 집으로 온다.


언니는 언니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로, 내게 늘 많은 걸 준다.

나는 언니에게 이제까지 별로 준 것도, 앞으로 줄 것도 없다.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이미 쓴 글로 내 둘째아들 이야기가 있다. 첫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아이에게 편지로 벌써 세 권이나 써줬기에 더 생각나는 말이 없었고, 둘째아이에 대한 글은 제대로 써주지 못해서 둘째아이 이야기를 제일 먼저 썼다. 하지만 난잡한 글이라 블로그 비공개 상태이다.

친정엄마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지만 아직 양가적인 감정이 정리가 되지 않아 글을  자신이 없다. 남편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또 글을 써낼만큼 추억이 많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언니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술술 글이 써졌다. 내가 태어나서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내 기억에 있는 언니와는 추억도 많고, 양가적인 감정은 없다. 이상하게도 언니에게는 부러움은 일어도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언니는 그저 고맙고 고마운 내 사람..


나는 언니가 안 아프고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몸이 약한 언니가, 약한 몸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해내는 언니가 나는 때때로 두렵다. 언니가 아프면 내가 힘들 것이기 때문에. 안 아프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늙어서 함께 여행다니자는 그 약속 서로 꼭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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