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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믹스터디

학생의 리듬을 설계하다- 설계자의 생각

by 리드믹스터디

우리는 보통, 좋은 대학을 갔냐, 좋은 직장에 다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인간인가?”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나는 수능에 5번 응시한 사람이다.

그냥 응시해본거 아니냐고? 아니, 진지하게 5년을 거기다가 투자한 사람이다.

수능을 5번 봤다니, 당신은 이렇게 내게 반문할 수 있다.

'수능 5번 봤으니까 좋은 대학갔겠지?'라는 질문이라면, 조용히 뒤로가기를 눌러도 좋다.

그러나 당신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당신은 나와 같이 더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수능을 5번씩이나 본 것인가?'라고 말이다.


그러자면, 내 정체성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항상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었다.

외부에서 나를 규정하는 것은 ENTP, 의대생, 동아리 반장, 과대 등이었으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건지, 혹은 무엇을 해야하는건지 세상이 알려주는 정답은 불충분했다.

'그냥 적당히 살면 되는거 아니야?'

'그 나이면 어떤 어떤 루트를 밟아야지.'

'돈 많이 벌면 좋은거지.'


나는 이 루트를 착실히 밟아왔고, 사람들이 원하는 높은 학벌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내게는 그런 소리들이 하나의 소음 같았다.

당신들은 뭔데 나에게 정체성을 강요하는가?

내 정체성은 내 스스로 규정할 수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속에서 어느 정도 나란 인간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언제나 불만족스러웠다.


나는 꽤나 영리한 학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영리함이란, 사회에서 측정되는 문제풀이 기계, 높은 IQ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를 영리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문을 던지는 것을 습관처럼 여기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납득되지 않으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을 원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나는 성적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러는 한편, 시스템과 자주 충돌하기 시작했다.

나는 빨리 푸는 패턴을 강요하는, 기출을 변형한 멍청한 문제를 내는 내신이 싫었고,

수시 비중을 늘려나가자고 주장하면서 '사고 다양성을 파괴하는 다양성'을 부르짖는 멍청이들이 싫었고,

갑자기 리듬이 뚝 끊기는 멍청한 문제들이 싫었다.

그 '멍청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나는 2013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공부법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갈증은

때로는 현역 시절 머리를 빡빡 깎는 것으로,

때로는 독서실에서 시험을 망치고 혼자 흐느끼는 것으로,

때로는 공부를 하기 싫은 것으로 나타나곤 했다.

나는 필연적인 '사고 방식'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제 풀이는 재미 없는 것으로 구조화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재수 때는 솔직히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또 실패했다.

그래서 나는 삼수를 했고, 삼수 때는 적당히 다른 학생들처럼 적당히 열심히하고, 적당히 패턴화를 시켰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에 대충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도, 나는 전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아무튼 군대를 가게 됐다.

군대는 내게 있어서 정말로 폭력적인 공간이었다.

왜?를 던지기보다는 수행을 먼저 해야하는 집단.

나는 거기서 극도로 예민해졌고, 훈련소에서는 긴장 속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폐급 훈련생이 됐다.

좀 더 느슨한 환경인 자대에서 익숙해지면서 나는 내 임무는 잘하지만,

선임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후임에게 부조리로 걸리지 않을 수준에서 적당히 푸는 인간이 돼버렸다.

여전히 자대 동기들, 그리고 선후임과는 연락하면서 지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지.

기억은 미화된다고 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군대에 있었던 기억을 미화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복학해서도 내 관심은 인문학, 경영학 같은 인문 전공에만 있었다.

특히 서울대에서 들었던 인문학 교양 강좌를 제일 재밌게 들었다. 이름이 진화와 인간 사회였나?

이 과목에서 A+를 받고, 이 과목이 너무 재밌어서 진지하게 인문학도가 될까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 그걸 선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강의는 내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나는 끊임없이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갔고,

코로나가 터지면서 고등학생 시절 묵혀놨던 의대에 대한 꿈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를 핑계로 내 시간 1년 반 가량을 수능에 투자하면서도, 내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독학재수학원에서 7월부터 11월까지 머물렀고, 다음 년도에 3월부터 7월까지 독학 재수학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성적은 계속 흔들렸고, 독학재수학원에서는 장학에서 잘릴 위기에 놓였다.

결국 나는 좀 더 안정적인 장학금 여건을 보장해주는 재수종합반으로 이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공부에 대해서 하던 고민은 재수종합반에서 패턴화를 통해 연결되게 된다.

거기서 나는 8월부터 성적이 계속 올라서, 10월 더프에서는 전국 한자리수 등수를 찍기에 이른다.

그 때부터 나는 의대에 갈 수 있냐보다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냐에 포커스를 맞추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 해에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대 생활은 공부는 재미없지만, 사람들은 재밌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서 알바도 하고, 과외도 하면서, 나는 내가 했던 고민들을 바깥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왜 어떤 학생들은 공부를 못하고, 어떤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머리 때문인가?

물론 그것이 의대급의 퍼포먼스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의 성취의 기대치가 하늘 꼭대기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스스로 계속 질문했다.

똑같은 공부법을 왜 어떤 학생은 잘 받아들이고, 어떤 학생은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 말이다. 고백하자면, 그 과정에서 나도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에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은 나와 수업을 진행했던 학부모들이 더 잘 알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독학재수학원에서 꽤 오래 근무했다. 약 3년 동안 근무하고, 곧 이탈을 준비한다.

왜냐면, 천편일률적인 공부법을 강요하는 그런 문화에 내 스스로 동화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커리큘럼의 구조를 학생에게 강요하고, 생각할 기회를 뺏는 일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의 리듬이 끊겨있는 학생들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나오게 됐다.

리드믹스터디는 학원 원장님의 제안에서 단초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나, 리듬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리드믹스터디는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며, 내 스스로 매번 고뇌하고 갈등했던 지점에서 만들어졌다.

사교육은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수준에서 그치면 안된다.

이 사람의 생각의 리듬이 어디서 끊겨있는가,

이 사람은 어디서 생각하는 것을 멈췄는가,

이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헤맬 수 있는가를 짚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이 실패하는 것이다.


당신이 아래와 같은 사람이면, 나는 당신과 함께할 의향이 있다.

공부법이나 시스템 대신, 스스로 사고하고 학습하는 방법을 찾고 싶은 사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하는 고통에 노출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

단기적으로는 성적이 내려갈지라도, 장기적인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

기존 학습 시스템이 스스로를 개선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제, 리드믹스터디는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것은 내 존재, 내 실패, 내 고뇌로부터 태어난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는

당신이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을 시작해야 하는가’를 묻기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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