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가 모국어인 나라, 그곳은 내가 배우는 외국어가 생활에 중요한 수단이므로 자연스럽다.
귀로 들려오는 외국어가 태어날 때부터 뇌에 자리 잡은 모국어 저장창고를 거치지 않고서도
손과 발로 전달되어 즉각 반응하고 있음을 경험한다.
머리로 굳이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똑같이 내뱉어본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들에 아침 점심 저녁 패턴이 생기듯 내가 말하는 외국어에도 패턴이 생긴다.
대학교 3학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대학에서 놀만큼 놀았다고 생각한 나는 과감하게 휴학계를 낸다.
전공 학습에 몰입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엄마에게 허락을 구할 때나 써먹었고,
이렇게 졸업하면 아쉬우니 1년 더 제대로 놀아보자라는 마음 하나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당시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10년 째, 중국의 물가는 꽤 저렴하였기 때문에 많은 유학생이 중국에 퍼져 있었고, 나는 한국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인 대륙의 남서쪽 윈난 성의 성도 쿤밍으로 향한다.
중국의 윈난 성은 한국에서 보이차로 유명해졌지만 한반도 2배 크기이고 많은 소수 민족이 살고 있어 중국에서 가장 특색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윈난 성의 성도인 쿤밍은 꽃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4계절이 따뜻하고 소수 민족들이 화합의 장을 여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漢族)이 소수 민족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지가 확인된다. 소수이기 때문에 무시하기도 하지만 특색을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과연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쿤밍에는 한국 유학생보다 일본 유학생의 비중이 높았는데, 알고 지낸 대부분의 일본인 친구들은 소수 민족 문화에 관심이 많고 연구하고 싶다고 하였다. 여유 시간이 날 때마다 소수 민족의 지역으로 여행을 다니며 놀이 문화를 체험하고 장신구와 옷의 패턴을 살펴보며 관찰하였다. 체질적으로 비교하기 싫지만 문화를 파고드는 일본인을 보니 언어만 파고드는 한국인으로서 뭔가 뒤처지고 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반성하게 된다.
운남 사범 대학교 어학연수반의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소수 민족 춤 수업이 있었다. 한국, 일본, 태국, 슬로바키아, 독일 등 10명의 여학생들이 중국 선생님을 따라 대형을 맞추어 본다. 동작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팔은 아리랑 하듯이 펼치고, 왼쪽 오른쪽 한 박씩 점프하며 무게중심을 옮긴다. 역시 아리랑을 아는 한국인들의 리듬감이 가장 좋다. 그리고 열중쉬어 자세로 두 손을 등뒤에서 잡고 상체를 45도 구부린 상태에서 어깨를 수평하게 좌우 한 번씩 위아래로 움직인다. 균형을 잡지 않으면 어지러울 수 있다. 묘족(苗族) 은 수술이 달린 화려한 모자와 장신구를 착용하기 때문에 수술들이 힘차게 흔들려야 아름다워 보인단다. 그때까진 방과 후 활동 인 줄만 알았기 때문에 운동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흔들었다.
며칠 후 선생님은 외국인들이 함께하는 소수민족 춤 페스티벌에 나갈 거라는 깜짝 발표를 한다. 각 팀의 소수민족 춤 공연을 차례로 선보이고 피날레로 모든 참여자가 무대 위에서 원으로 대형 맞춰 강강술래를 한다는 것이다. 두 벌의 의상이 준비되었고, 그제야 내가 추는 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화려한 복장, 그리고 대형을 갖춘 단순 반복의 춤 동작은 연습실에서 보다 무대 위에서 확실히 빛이 났다. 행사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는데, 어차피 나를 알아볼 사람은 없을 테니 창피함을 잠시 묻어두고 그 시간을 즐기기로 하였다.
2002년 따뜻한 봄날 쿤밍 소수민족 춤 페스티벌에서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사진들 속에 있던 사진을 꺼내어 본다. 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춤 동작은 생생하게 기억나니, 확실히 몸으로 배운 것들은 잊기 어렵구나 싶다. 춤을 추다를 중국어로 티아오우 跳舞 라고 한다. 동작 '추다'를 뜻하는 단어인 티아오 tiào는 폴짝폴짝 뛰다의 의미도 있고 이는 한국어의 도약하다의 '도(跳)'와 의미가 같다. 추는 동작을 뛰는 동작으로 표현한 중국어, 묘족의 춤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 의미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