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망했을 때를 대비한 확실한 보험

빛 잃은 피아노 전공생, Rian, 작은 왕으로 살다

by 리안박

'이제 뭐 할지 진짜 모르겠는데?'

피아노를 그만두고 나니 텅 빈 시간만 남았다. 교생실습도 끝났고, 졸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무언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영어라도 하자.'


[간판만 보고 들어간 곳]

사실 이 학원과의 질긴 인연은 엉뚱하게도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수능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서 학교 근처 대학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연히 간판만 보고 영어학원에 들어갔다. 영어는 뭔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인생이 망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 같은 느낌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 나의 첫 학원이자 영어학원. 데스크에 가서 물었다.

"회화 수업 듣고 싶은데요."

"저희 학원은 기본적으로 이 수업부터 들으시거든요. 이거 먼저 추천드려요."

별생각 없이 등록했다.


수업 시간에 맞춰 들어갔을 때, 선글라스를 쓴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선생님 이름은 Terry. 교재는 영어판 세종대왕 이야기였다. 학원이 낯설어서 제일 뒤에 앉았다. Terry 선생님이 학생들을 지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영어 문장을 막힘없이 말했다.

'뭐라는 거야? 외워야되는 거야?'

그 강의실에서, 첫날의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자 방관자였다.

Terry 선생님은 세종대왕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역사 이야기로 시작된 수업은 어떤 날은 누군가의 성공담, 어떤 날은 실패 후 일어선 이야기, 어떤 날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그리고 끝은 책을 같이 외우는 걸로 끝이 났다. 수업을 듣다 보면 자기계발서의 한 장을 읽는 것 같았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막연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피아노라는 방패를 버리고 텃새가 되기로 한 날]

3년 동안 나는 철새였다. 학기 중엔 피아노를 핑계로 쉬고, 방학에만 학원에 나타났다. 그렇게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어느 날 Terry 선생님이 물으셨다.

"전공이 뭐예요?"

"피아노요."

놀랍게도 철새처럼 오락가락하던 나를 선생님은 기억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피아노는 방패였다. '나는 음대생이니까 다른 학생들처럼 매일 올 수 없어' 하는 면죄부 같은 것.

피아노도 그만두기로 하고 교생실습도 끝난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철새가 아니라, 이곳의 정착민이 되기로.


[빛 잃은 피아노 전공생 대신, Rian, 작은 왕으로 살다]

학원의 모든 학생에게는 영어 이름이 있었다. 새로운 자아를 만들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밖에서 나는 피아노로 빛을 잃은 전공생이었지만, 학원 안에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름을 고르는 데 공을 들였다. 절대 겹치지 않을 이름. 뜻도 좋아야 했다. 외국 아기 이름 사이트를 뒤지다가 찾았다.

'Rian - Royal, The little king'

작은 왕. 괜찮은 이름이었다. 새로운 나, Rian이 탄생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법, 그리고 TEAM]

학원에서 배운 것은 영어만이 아니었다. 영어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서 간판만 보고 학원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고 나중에 들었다. 친구의 친구로, 학교 선배가 다녀서, 지인을 통해서 소개로 오는 곳이었다.

학생들은 학원을 '천하무적'이라고 불렀다. 같은 옷을 입고, 영어로만 말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함께 공부하는 작은 나라 같은 곳. 무적커들은 이 작은 나라로 유학온 유학생들이었다.

2평 피아노 연습실에 혼자 갇혀 솔로곡을 치던 나는 처음으로 'TEAM'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Together Everyone Achieves More. 경쟁이 아니라 함께.


선생님들은 늘 말씀하셨다. 땅에 붙은 껌을 떼고, 함부로 침을 뱉지 말고,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책상에서 일어날 때 소리 내지 말라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 대해 수업 시간마다 말씀하셨다.

피아노가 나를 고독한 천재라는 성벽 안에 가두려 했다면, 이곳의 가르침은 나를 광장으로 불러내어 사람들과 섞여 사는 법을 아는 사회인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금요일 새벽마다 열리는 보충 수업에는 '마음 공부' 시간이 있었다. 겸손함, 이기심을 내려놓는 것,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피아노라는 빛을 잃고 방황하던 나에게, 선생님들의 말씀은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매일 공부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그 말씀들을 떠올렸다. 철새 시절을 잊고 다른 학생들처럼 듣고, 외우고, 프레젠테이션 영상을 찍고, 말하기를 매일 반복했다.

예고에서 학교 공부만 하고 문법 공부는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토익 문제집 한 번 풀어본 적 없는데 토익 점수는 800점이 넘었다. 피아노 말고도 다른 것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다시 생겼다. 영상 수도 어느 덧 100개가 훌쩍 넘었다. Rian은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찾는 곳]

사람이 살다 보면 힘든 순간이 온다. 어떤 이는 종교를 찾고, 어떤 이는 운동을 하고, 어떤 이는 상담센터를 찾는다.

나는 여전히 그 학원을 철새처럼 찾아간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한참 만에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Rian, is that you? Welcome again."

수능을 갓 끝내고 와서 철없이 돌아다니다 겨우 정착한 Rian을 한결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배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물론 이코노미스트를 배우고, BBC를 듣고, 수업에 와서 졸면 혼나고, 발표도 당연히 시켜주신다.

누가 다 큰 나를 이렇게 혼내 주시겠는가. 계속 혼내주세요. 발표도 시켜주세요.

피아노를 그만둔 뒤 처음으로 '나도 뭔가 할 수 있구나' 하고 느낀 곳.

영어라는 언어 뒤에 숨어 있던, 세상을 살아가는 정직한 근육을 배운 곳.

나는 그곳에서 Rian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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