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정치맛집 동아리 초원복집연구회 창립사
“우리가 남이가”
한국 정치를 이보다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1992년 12월 11일,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당시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이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법무부 장관에서 막 물러난 김기춘은 그날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을 비롯한 부산지역 주요 기관장 9명과 함께 부산의 ‘초원복국’에 모였다. 김기춘이 한 말은 바로 “우리가 남이가.”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영남이 결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선거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 자극하기로 공모하였다. 마침 이 식당에 통일국민당 측 선거운동원들이 도청기를 설치해두었고, 이 녹취록은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하지만 적반하장으로 민주자유당은 통일국민당의 ‘불법 도청’을 강조하면서 여론전을 펼쳤다. 민자당은 부정선거개입과 국가기관의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초대형 선거범죄를 ‘불법 도청’ 프레임 싸움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오히려 영남의 지역감정이 결집하여 민자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초원복집 회동의 참여자들이 승승장구하여 성공가도를 달렸음은 물론이다.
처벌받지 않은 ‘우리가 남이가’는 망령처럼 살아남아 이후 한국 선거를 좌우했다. 어느 지역이 더 잘 결집하느냐가 승패를 갈랐다. 정치인들은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했다. ‘우리가 남이가’는 그렇게 우리 정치를 지역토호 기반의 양당제로 유지시켰다. 2013년, 박정희의 ‘김똘똘’은 박근혜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유신독재가 민주사회를 지배했던 방식이 다시 활개를 쳤다. 정보기관을 활용한 교묘한 지역감정 조장, 불법적인 선거개입 등이 치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던 2016년 11월, 굳건해져만 가던 ‘우리가 남이가’에 균열이 갔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알려지면서 시민들이 광장을 메웠다. 끝없이 넘실거리던 촛불은 권력을 끌어내렸다. 마침내 25년 전 초원복집에서 탄생한, 한국 정치의 괴물 ‘우리가 남이가’를 끝낼 기회가 왔다.
그런데 ‘우리가 남이가’를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성업하고 있는 초원복집 만큼이나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밀실정치의 야합은 여전하다. 얼마 전 검찰의 돈봉투 만찬 사건은 밀실에서의 ‘그들만의 논의’가 여전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 악순환이 정치와 일상의 분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간 ‘정치’는 ‘윗분들’의 영역이었고, ‘일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바쁜 ‘시민들’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분리는 한국정치가 식당을 소비해온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초원복집’으로 대표되는 식당들은 그간 한국정치의 순간순간마다 등장했지만 두 가지 유형으로만 존재해왔다. 하나는 이른바 윗분들의 밀실회담이 이루어지는 ‘정치용’으로, 다른 하나는 친서민 이미지 포장을 위한 ‘선거용’으로 존재했다. 단 한 번도 한국정치에서 식당은 ‘일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정치는 표 구걸을 위해 선거철에나 일상에 잠시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시민의 일상이 있는 식당은 정치적 목적을 띈 상황에서만 정치인에게 ‘일상’이 아닌 ‘정치’로 소비되었다. 일상의 공간에 있지 않았던 정치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국정농단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이제 식당에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 야합과 권력의 공간이었던 식당은 이제 정치가 시민들과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바로 일상 공간과 정치 공간의 합일이다. 시민의 일상적 공간에 정치가 들어오고, 정치가 시민의 일상을 담아내야 한다. 일상의 정치화, 그리고 정치의 일상화만이 ‘우리가 남이가’의 망령을 본질적으로 끝내는 유일한 해법이다.
퇴근길 회사원이 정치인과 일상을 살아가는 직업인으로서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시민사회의 이상향이다. 정치인이 권력자가 아닌 직업인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우리의 정치가 우리의 일상이 되길 바란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정치맛집 동아리 초원복집연구회는 오늘 첫발을 딛는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이 새로운 민주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17년 10월 1일
정치맛집 동아리 초원복집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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