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사랑

구 남매의 연둣빛 여름

by 리치

어린 시절 우리 집 정원은 철마다 다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수채화 같았다. 그중에서도 여름의 정점은 단연 포도나무 아래였다. 9남매라는 복작거리는 울타리 안에서, 여덟 번째 아이였던 나는 늘 언니들의 뒷모습을 보며 세상을 배웠다.

여름방학이 되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9남매의 '2번 타자'인 둘째 언니가 포도수확의 지휘봉을 잡았다. 언니가 정원의 긴 의자를 딛고 올라서면 나는 밑에서 "언니~~ 저거 저거 " 하며 햇살에 노르스름하게 비친 포도송이를 가리다ㆍ 내 야무진 분부(^^)에 언니는 저 높은 곳에 매달린 맑은 연둣빛 포도송이를 툭, 하고 따냈다ㆍ러면 나와 남동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커다란 바가지를 받쳐 들고 그 보석 같은 알맹이들을 소중하게 담아냈다.

햇살을 머금어 투명하게 빛나던 그 연둣빛 포도는 단순히 과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가족의 질서 안에서 막내급인 우리에게 허락된 달콤한 임무였고, 언니의 손끝에서 내려오는 따스한 내리사랑이었다.

포도나무 옆 앵두나무에는 송충이가 무서워 다가가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지만, 언니와 함께했던 포도나무 아래서만큼은 두려움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9남매라는 거대한 나무의 여덟 번째 마디로 자라나며, 나는 그 연둣빛 포도송이처럼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넓던 정원도, 포도를 따주던 언니의 젊은 시절도 아득한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연둣빛 포도를 마주할 때면 여전히 코끝에 싱그러운 포도 향이 스치고, 바가지를 들고 언니를 올려다보던 열 살 소녀의 설, 그 찬란했던 청포도 사랑이 오늘 , 예순 을 넘긴 여덟째 딸의 펜 끝에서 익어간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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