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로맨티시스트 눈사람

by 리치

비행 스케줄이 없던 날이었다.

나는 집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휴식이 아니었다.


2년을 사귀며
나의 승무원 도전조차 반대했던 사람.

딱 1년만 비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맞춰야 했던 남자친구에게서
나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후배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믿기 힘든 사실은

절망이 되어 나를 덮쳤다.

나는 그 비참함 속에서 혼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내 세계가 온통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때,


정적을 깨고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서로 제 친구의 전화일 거라며 경쟁하듯 달려가던 남매들 중 한 명이

수화기를 들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은영아, 너 바꿔달래.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네?”


내 바로 위 언니는 마침 결혼 준비를 위해 퇴직하고 집에 머물던 참이라,

집안은 평소보다 북적이고 생기가 넘쳤다.

수화기 너머로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뜸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혜화동에서 만나자고 했다.


내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는 자꾸 이런 기습적인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걸까.

어쩌면 현우는,

당당하게 나를 보고 싶어 할 명분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느닷없는 연락만이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안함과 고집스러움이 뒤섞인 그 기습적인 초대를,

나는 이번에도 이기지 못하고 외출 채비를 했다.


혜화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 현우가 서 있었다.

때마침 겨울 아이인 내게 축복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세상의 소음을 모두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눈송이 사이로 그가 보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현우 역시 나와 생일이 단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겨울 아이였다.


같은 계절에 태어나 비슷한 온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묘한 유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걷는 것만으로도

강아지처럼 신이 났던 내 발걸음이

대학로 길가 리어카 상점 앞에서 멈추었다.

현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몸의 반을 차지할 만큼 커다란 곰 인형을 불쑥 내게 안겨주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뜻밖의 선물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ㆍ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남자친구에게 처음으로 받아본 날이었다.


그 푹신하고 거대한 온기가 눈 내리는 거리에서

내 품을 가득 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인형 뒤로 숨긴 내 얼굴에는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날 눈 내리던 대학로에서

나는

오랜만에 설레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품에 안긴 커다란 곰 인형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그날 이후로도 현우는 눈이 퍼붓는 날이면

예고 없이 내 앞에 나타나 꽃다발을 건네주곤 했다.

그는 내 생애 가장 따뜻했던, 결코 녹지 않는 '로맨티시스트 눈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