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전했을 때,
현우는 평소처럼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위로 같기도 했고,
어쩌면 조심스러운 기다림 같기도 했다.
잠시 후
그가 내 손을 잡아끌고 들어간 곳은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가 빼곡히 꽂혀 있던 작은 상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바(ABBA)의 노래 모음 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The Winner Takes It All’이 담겨 있었다.
그 노래가 그때의 내 마음과 너무 닮아 있어서였을까.
나는 망설임 없이 그 테이프를 골랐다.
《 현우가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준 카세트테이프 》
그렇게
현우와 나의 데이트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대학로 거리에는 늦은 저녁의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거리를 걷던 현우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현우는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 너 좋아해.”
그 고백은
서두르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흘러나왔다.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나도 네가 좋아.
그런데… 내가 한 살 많은 누나잖아.’
현우와 나는
재즈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태원 소방서 앞에
지하에 위치한 재즈 카페를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는
필리핀 가수가 몇 안 되는 관객들을 위해
느끼하고 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재즈 선율이 낮게 흐르던 밤,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칵테일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잔 속의 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눈빛도 함께 번졌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
나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빛이 좋았다.
재즈카페 옆 건물 2층, 작은 콜라텍에서는
‘Wham’의 Careless Whisper에 맞춰 느린 블루스를 추었다.
현우에게는 대한항공 로고송 ‘웰컴 투 마이 월드’가,
나에게는 Careless Whisper.
그 노래들은
각자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나는 전 남자친구의 강요로 승무원 생활을 접은 뒤
소공동 조선호텔에 있는 외국항공사의 한국 판매 대행사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현우의 학교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 날
현우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나… 너랑 여행 가고 싶어. 부산 자갈치 시장도 가 보고.”
하지만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내 마음을 붙들고 있던 망설임의 정체는
연하의 남자를 연인으로 둔다는 생경함이었다.
게다가
현우의 누나가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은
쉽게 넘기기 어려운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고지식한 기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던 사람이었는지.
내가 세운 견고한 벽을 허무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던 사람인지.
그때의 나는
마음은 이미 현우를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현실의 발걸음은
여전히 망설임이라는 이름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