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현우에게 나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 나 아직 너와 어떤 관계로 이어가야 할지 결정을 못 했어.”
현우는 서운한 기색 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늘 그랬다.
무엇 하나 강요하지 않는 차분한 기다림.
내 모든 복잡한 상황을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그 깊은 눈빛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연말이 다가오고,
현우의 의과대학 파티가 열리던 날이었다.
“최대한 예쁘게 입고 와~.”
그의 말이 못내 신경 쓰였던 나는
결혼한 친구에게 화려한 원피스 한 벌을 빌려 입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평소의 나는 단정한 정장이나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더 편안해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현우가 기죽지 않을 여자친구로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충무로의 어느 빌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엔 이미 한껏 치장한 여대생들과 짝을 이룬 현우의 동기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 아래서
나는 이상하게도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현우가 소개하는 동기들과 선후배 커플들 사이에서,
나는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들 틈에 섞여 있는
나 자신이 못 견디게 낯설고 불편했다.
그 소란스러운 파티장 한편에서
현우와 나는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커플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사진 속의 우리는 나란히 웃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을 담은 그 사진 한 장이,
훗날 현우와 나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게 될 도화선이 될 줄은
그날의 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현우를 만났다.
현우는 갑자기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 커피숍으로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나선 길,
그는 누나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툭 내뱉었다.
미리 귀띔이라도 하면 소극적인 내가 뒷걸음질 칠까 봐,
그는 그렇게 기습적인 만남을 준비했던 것 같다.
나와 동갑이라던 그의 누나.
불편한 동갑내기 시누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미리 만난다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더 당혹스럽게 만든 건
평소의 현우답지 않은 돌발 행동이었다.
그는 나를 약국으로 데려가더니
아세톤 한 병과 탈지면을 사서 불쑥 내밀었다.
“저기, 빨간 매니큐어 좀 지워줘.”
그때까지도 현우와 나는 서로 이름을 부르기 어색해했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대학생 딸의 수업 시간과 귀가 시간을 엄격히 통제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게, 취업 후 ‘빨간 매니큐어’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수수한 복장을 강조하시던 아버지와 마주 앉은 식탁에서,
나는 승무원의 회사 규정을 방패 삼아
새빨간 손톱으로 당당히 젓가락질을 하곤 했다.
그것은 나를 향한 자유의 상징이자,
아버지의 구속에 소리 없이 저항하던 나의 징표였다.
그런 나의 소중한 상징이,
탈지면에 아세톤을 묻힌 채
손톱 위의 붉은색이 사라져 갔다.
마치
나의 작은 자유 하나가
조용히 지워지는 것처럼.
그 자리에는
현우의 누나 앞에 설
수수한 이미지의 여자친구가 남아 있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마주한 누나는 현우와 달리 털털하고 밝은 인상이었다.
남동생의 여자친구로 만난 동갑내기 친구.
나는 그 어색함 속에서 최대한 나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했다.
곁에 앉은 현우 역시 평소와 달리 몹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아마도
내가 조금은 고집스럽고 뻣뻣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누나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