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지켜지지 않은 약속

by 리치

그해 여름은 나에게도 현우에게도 바쁘게 흘러갔다.


가을이 깊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더 자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시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다던 현우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그가 공부하던 도서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도서관 책상 위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세상모르게 엎드려 잠든 현우의 모습이었다.

여자친구를 오라고 해놓고 긴장감 없이 꿈나라를 헤매는 그 모습이

어쩐지 느긋해 보이기도 했고, 무엇에도 쫓기지 않는 듯한 그 특유의 여유가 싫지 않았다.


잠든 현우를 흔들어 깨우자,

그의 입가에는 민망하게도 침 자국이 묻어 있었다.

늘 단정하고 깔끔한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던 내게,

연인 앞에서 침 흘린 얼굴을 보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현우의 그 허술한 얼굴을 본 순간,

어이없는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지금도 그날, 현우의 충혈된 눈과 멋쩍게 웃던 침 묻은 얼굴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어묵 한 꼬치를 나눠 먹고 있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두 사람, 오누이처럼 참 많이 닮았네.”

현우와 길을 걷다 보면 가끔 듣던 말이었는데,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이슬과 마크.


나는 현우를 ‘마크’라 불렀고, 현우는 나를 ‘이슬’이라 불렀다.

내가 한 살 연상이라는 미묘한 거리감 때문이었는지,

서로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웠던 우리가 정한 애칭이었다.


‘마크’라는 이름은 현우가 내 목덜미에 남겼던 붉은 흔적에서 시작되었고,

‘이슬’은 술에 약한 내가 현우의 주량에 비해

이슬만큼 조금씩만 마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리는 흑석동의 카페와 신림동의 순대볶음 시장,

그리고 신림 고시촌 앞의' 새벽'이라는 주점을 자주 찾았다.


어느 날, 현우의 학교 앞 카페에서였다.

현우가 담배를 피우다 튄 불똥이 내 코트 앞섶에 내려앉았고,

아끼던 모직 코트에는 야속하게도 작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 코트는 내가 승무원 입사 후

첫 월급으로 샀던 의미 있는 코트였다.

속상해하는 나에게 현우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이슬아, 내가 나중에 이 코트 대신 꼭 다이아 반지 사줄게.”


나는 그 약속이 귀여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아주 예쁜 반지로 사줘야 해.”


그 약속은 결국 영원히 지켜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구멍 난 그 코트를 아주 오랫동안,

빛바랜 옷장 깊숙한 곳에서 버리지 못한 채 간직했다.

코트에 뚫린 그 작은 구멍이

마치 우리가 나누었던 미완의 약속 같아서,

나는 그 옷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