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와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현우는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첫 장을 넘기자 정갈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슬에게, 마크〉
혜화동 근처에서 현우는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셨다.
취기가 조금 오른 그는 느닷없이 내 손을 이끌었다.
“우리 큰아버지 댁에 잠깐 들르자.”
내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그는 나를 데리고
우리 집 근처에서 치과를 운영하시던 큰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인자한 얼굴의 큰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나와 근처 카페에 앉았을 때,
현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이슬이 사진을 엄마께 보여드렸어.”
현우의 어머니는
현우가 일곱 살 때 남편을 잃고
공무원 생활을 하며 홀로 남매를 키워낸 강인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내 마음은 차갑게 내려앉았다.
“엄마가 그러셨어. 이렇게 화려한 이미지의 여자는
집에 들어앉아 살림할 타입이 아니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우와 찍은 사진 속
지난 연말 파티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에게 빌려 입었던 화사한 핑크빛 공단 원피스.
평소보다 공들여했던 조금 짙은 화장.
나 역시 그날의 내가 평소보다 훨씬 화려해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직접 만나보지도 않은 채
사진 한 장으로 내 삶을 단정 짓는 평가는
내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게 만들었다.
한편으론 엄마의 말을 눈치 없이 내게 전하는 현우가 못마땅했다ㆍ
그런 내 속도 모르고 현우는 떼를 쓰듯 나를 재촉했다.
“지금 우리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인사하자. 응?”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누르며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말하며 그를 달래 겨우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부모님은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에 가셨고 집에는 남동생만 있었다.
잠시 후 현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앞이야. 잠깐만 내려와.”
나는 단호하게 돌아가라고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
두 시간이 지나 미사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호통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내려오지 않자
술에 취한 현우가 우리 옆집 담벼락에 실례(소변)를 범했고
이를 본 옆집 아저씨와 시비가 붙어 결국 경찰에 신고까지 된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수군거리는 줄도 모르고
나는 방 안에서 언짢은 기분만 삭이고 있었다.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던 아버지는
대문을 열자마자 불호령을 내리셨다.
“도대체 어떤 녀석을 만나고 다니길래 온 동네 망신을 시키는 거냐!”
결국 현우는 밤새 동네 파출소 신세를 져야 했다.
퀭하고 충혈된 눈으로 경찰관 앞에 앉아 있던 현우를 보았을 때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동네에서 치과를 하시던 큰아버지가
조카인 현우를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소동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소식은 결국 현우의 어머니에게까지 전해졌다.
안 그래도 사진 속 내 모습조차 탐탁지 않아 하셨던 분이었다.
이번 일로 그분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틀 후 현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해.”
카페에서 마주 앉은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우는 텅 빈 커피잔만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게 끝인 걸까.
잠시 후 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슬아.. 우리 첫째, 셋째 토요일에 이촌동 난다랑에서 만날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확신 없는 약속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예전의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마크’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공기는 이미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의 불호령보다 더 무거운 것은
현우에 대한 내 안의 무너진 신뢰였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해진 셋째 주 토요일.
신기하게도 그동안 쌓였던 원망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었다.
소공동 사무실에서 퇴근하자마자
나는 홀린 듯 택시를 잡아타고 이촌동으로 향했다.
길가에 자리 잡은 난다랑 카페.
그 창가 자리에 현우가 앉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현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이촌동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말 끝이구나.’
그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가을이 되었다.
나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수개월 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 날짜까지 잡았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나… 결혼해.”
긴 침묵 끝에
현우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미안하고…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