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동굴 연대기

눈더미에서 무대 뒤 구석까지

by 리치


photo by 리치 ,@ 2019


내 인생의 서랍을 열어보면, 서로 다른 시간대에 놓인 두 개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마주 보고 있다.

하나는 열 살 소녀가 팠던 시린 눈더미 속 이었고, 다른 하나는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진

모델 대기실의 좁은 모퉁이다.


어린 시절, 9남매라는 북적이는 울타리는 내게 늘 과분한 소음이었다.

그 소음을 피해 도망친 곳은 마당 한편에 쌓인 하얀 눈더미였다.

나는 차갑고 하얀 눈덩이를 파내어 나만의 아지트 동굴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은밀하게 그려낸 노란 소변 온기가 하얀 눈 위로 번져갈 때,

내 눈에는 마치 달콤한 노란 솜사탕처럼 보였다. 차가운 세상이 나를 가두려 할 때마다,

나는 그 동굴 속에서 맛보았던 '자유'라는 이름의 솜사탕을 떠올리며 나만의 세계를 지켜냈다.


세월은 흘러 눈더미는 녹아 사라졌지만, 내 안의 동굴은 무대 뒤 대기실에서 다시 태어났다.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한 조명 아래 서기 전,

대기실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이 칼날처럼 유영하는 전쟁터였다.

나는 다시 본능적으로 대기실 가장 깊숙한 구석 자리를 찾아내곤 했다.

거울 속의 나는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겹겹이 칠해져 있었지만,

의자 다리와 벽 사이의 그 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는 순간, 나는 다시 마당 구석의 그 어린 소녀가 되었다.

벽면의 차가운 감촉은 눈더미의 살결처럼 나를 안아주었고, 소음이 닿지 않는 그 정적의 공간 안에서

나는 비로소 분칠 속에 가려진 진짜 내 얼굴과 마주했다.

사람들은 내가 무대 위의 화려한 빛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나를 살게 한 것은

그 빛으로 나아가기 전 어둠이 내어준 고요한 영토였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지켜준 것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파 놓았던 그 작고 초라한 동굴들이었다는 것을.

그곳은 타인의 허락 없이 오직 나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고독의 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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