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50분

by 잭Jack

유기

너는 내가 후드티가 예쁘다고 하면 티 한장만 입은 채 집에 가니까. 내가 절대 꽃을 사두지 말라고 하면 꽃을 들고 있으니까. 내가 갑자기 길에서 울어버리면 바로 뛰어와 나를 달래주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고 울어도 곧장 달려와줘서 나는 네가 너무 좋아.


7시 50분

어떤 날에는 일부러 7시 50분에 도착하려고 애썼고, 어떤 날에는 멀리 돌아가 커피를 샀다. 매일 붐비는 이 회사에서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탄 날은 너무 신기했다. 사실은 내가 노력했어. 나는 까만 타일에 비친 실루엣만 봐도 네가 왔다는 걸 알았거든. 너 때문에 종이책을 사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어. 네가 소방관이 되어도 좋을거야. 너무 어울리거든. 이해할 수 없는 문신이 있지만 리본이 그려진 팔이 너무 멋져서 괜찮았어. 오뎅바와 자라 세 마리, 셔츠와 막걸리. 저승사자같은 까만 셔츠. 여전히 너는 내 눈에 너어무 멋져.


사랑의 단상

46/ 매혹을 묘사한다는 것은, 결국 '나는 매혹되었어'라는 말을 초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58/ 한마디의 불경한 언사가 갑작스레 주체의 입술에 떠올라 무례하게도 연인의 경건함을 깨뜨리고 만다. 그는 자신의 입을 빌려 말하는 마귀에 들린 것이다. 그 입에서는 동화에서처럼 더이상 꽃이 아닌 두꺼비가 나온다. 이미지의 소름끼치는 역류.


74/ 나는 사랑하고 있는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허기

올해 20권의 책을 정독했다. 독서기록까지 작성하며 정독한 책이 10달 동안 20권이라고 생각하면 적지 않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 허기지다.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찾고싶은 답이 있다. 독서는 감정소모가 크다. 문장을 긁다 숨이 턱 막혀서 책을 덮는다. 몇달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허기가 가신다.


구구절절

말보다는 글이 실수할 확률이 적다. 말에는 자꾸만 쓸데없는 주석이 붙어서다. 그런데 요새 글에도 자꾸만 쓸데없는 말이 덧붙는다. 쪽대본으로 써둔 글은 계속 쌓여가는데, 다시 펼쳐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42명만을 위한 작가라는 페르소나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나. 쓰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도 보고, 뮤지컬도 보고, 음악도 듣고, 잡지도 읽는다. 소화시키려고 걷고 또 걷는다.


글을 쓰는 행위의 가치는 불변한다. 어쩌면 계속 우상향하는 유일한 재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Chat GPT를 켜는 나지만, AI는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단 한 줄도 적어줄 수 없다. 글을 쓰다보면 머리가 뻥 뚫리는 듯 쾌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도 내가 썼던 글들 중, 아끼는 문장들이 몇가지 있다. 다른 단어로 수정을 하려고 해도, 대체가 어려운, 아주 딱 적절한 말. 수려한 작문 실력은 아니지만 연말마다 한 해를 회고하며 작성하는 글들에도 스스로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읽히는 글을 자꾸 써봐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한 전제는 나를 펼쳐두는 것이다. 책상 위에 나라는 사람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쭉 펼쳐본다. 그 중에는 자랑하고 싶은 일도 있고, 보이고 싶지 않아 구겨둔 일들도 있다. 합리화로 점철된 거짓말도 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적어본다.




이제 좀 쉬자. 정말! 쿨쿨Z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