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던 스물둘의 저를 홀로 설 수 있는 어엿한 기획자로 키워준 고마운 회사를 떠납니다. 인정에 칭찬에 후한 조직에서 철없이 업무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두고 오는 느낌입니다. 저는 무엇을 두고 왔길래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요. 그래도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내일은 새 회사로 출근을 해야죠. 제가 일 복 하나는 타고났습니다.
크고 작은 도전과 성취, 그리고 실패를 통해 숨은 재능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일을 벌이고 수습하기를 반복한 결과 이제 근거라고 들이밀 경험이 조금은 쌓였습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와 인정받고 싶은 마음,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과 좋은 선배들이 함께한 덕분입니다.
지난 직장에서 제 별명은 회사 지박령, NPC였어요. 자정에 퇴근을 해도 다음 날 7시면 출근을 했습니다. 괴담처럼 언제나 자리에 있고 휴가도 쓰지 않고 일만 하는 사람이 저였네요. 한 마디로 많이 과했습니다. 스스로 질책하고 주저앉는 일이 잦았지만 어린 후배의 치기 어린 열정으로 받아주신 선배님들이 계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손이 가는 대로 4년을 풀어봅니다.
이 사람은 나를 왜 싫어할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유 모르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상사이거나, 함께 업무를 해야 하는 동료라면 꽤나 골치가 아파집니다. 일련의 힘든 시간들을 겪으며 제가 찾아낸 답은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납득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하러 온 회사에서 누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니. 하지만 저는 이 일과 회사가 간절했어요. 입사 1주년이 되던 날, 두 장 짜리 편지를 썼어요. 쓰는 내내 울었고,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절반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편지를 마무리할 쯤에는 선배에게 감사한 점이 더 많이 떠올랐어요.
내가 상사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후배를 미워할 사람이 있을까요? 일을 덜어주고 그 공을 내게로 돌려주는 후배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저를 미워하던 선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부담스러워하거나 가식이라고 생각할까, 더 만만하게 보고 괴롭히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에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한 달 점심과 맞바꾼 위스키에 편지를 달았어요. 둘 중 하나는 그의 마음에 들 테니까요. 기쁘게도 선배님은 제 편지를 더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후로는 사외교육도 출장도 세미나도 원 없이 갈 수 있었어요. 그 선배가 곧 팀장이 되었고, 저는 팀장님만 설득하면 무엇이든 다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퇴사를 할 쯤에는 황금덩어리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는데 그게 제 꿈같다며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회초년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절대 누구에게 험담은 하지 마세요. 누가 물어도 내 선배와 상사는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다 보면 그분은 정말 당신을 그렇게 대해주실 거예요. 세상에 누굴 미워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들이 마음 놓고 당신을 좋아할 이유를 만들어 주세요! 걔가 날 진짜 좋아해. 그러니까 내가 걔를 챙겨줘야지.
그래도 당신을 싫어한다면 그건 정말 이유 없는 미움이겠죠. 그럼 그 사람을 안쓰러워해버리세요. 너는 내가 정말 밉구나. 정말 힘들겠어. 미운 사람을 매일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나 때문에 그 힘든 일을 하고 있구나. 나보다 네가 더 괴롭겠지. 저는 이런 마음으로 견뎠습니다.
조직에서의 효용감
이제 업무 이야기를 해볼까요? 입사 직후에는 주어진 업무가 없었어요. 신설 부서에 구색을 맞추려고 뽑았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뭔가를 해내리라고 믿어주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는 게 시간이라 서른 장 분량의 기획안을 작성해 공모전과 행사를 진행하며 손을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나요. 이때가 심장이 뛰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먹은 순간이었어요.
교육, 행사, 공시자료, 뉴스콘텐츠와 함께 마케팅 업무에도 발을 들여 기획이라는 세계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벅차 보이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없을까 봐 몰래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을 하면서도 점점 퍼포먼스가 났기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컸던 건 단연 업무협의체 운영이었어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저는 우리 협의체 구성원들을 끔찍하게 아끼게 되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했어요. 수화기를 들 때마다 반가움이 앞서고 교육을 준비하는 동안은 설렘이 모든 귀찮음을 압도했습니다. 이 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믿어주는 팀장님을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질풍노도와 과몰입 상태를 지나고 세 번의 조직개편을 거치며 그대로인 것은 저뿐이었습니다. 신설부서에서 할 수 있던 기획이 거의 자리를 잡고 남은 건 운영 업무였습니다. 루틴한 업무 속에서 내가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조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찾아왔습니다. 효용감을 잃어가는 느낌이 고통스러웠고 또래 친구들이 취업 시장에 풀리면서 생기는 불안함도 커졌습니다.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법
모든 것은 진심으로 대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심을 다하는 게 가끔은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너무 간절하면 모양이 빠져 보인달까요? 될 대로 되라며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멋져 보이긴 하잖아요. 저는 늘 하고 싶은 것도 아쉬운 것도 많은 사람이라 욕심을 내면서도 잘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누구나 처음은 초라한 걸요. 욕심내던 일을 잘하게 되고 그 일로써 인정받고,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일은 잠깐의 부끄러움에 비할 바 없이 달콤한 일입니다. 저는 부끄러운 선택을 지속하며 평생을 이렇게 달콤하게 보내고 싶어요.
새로운 도전
저는 이제 보수와 안정성, 기존의 경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 합니다. 세 달 정도 타인의 손에 미래를 맡겨두고 대책 없는 불안에 떨었고 책임지지 못할 어른들의 말만 믿었던 스스로를 탓할 시간이 없었기에 본격적로 원서를 썼습니다. 주제를 파악하는 건 잔인하고 어렵지만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제 한계를 느끼고 현실과 타협하며 최적의 절충안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 날이 있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자신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선택과 도전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의미 있는 도전 지속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꾸만 도전을 일회성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도전을 지속하려면 당장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필요하겠죠. 계속되는 도전은 결국 무엇으로 향하고자 함일까요? 제가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조직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메인 키워드에 맞춰 주요 이해관계자와의 의사소통을 증진하고 조직의 가치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듯, 업무에 임하는 임직원 개개인의 태도에도 지속가능한 발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팀원으로서 활발하고 건강한 소통과 상호작용을 추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내기까지 꾸준히 노력하는 편이에요.
스물 두 살 저의 초심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두둑한 포트폴리오를 안고 나가니 초심을 꽤나 잘 지켜왔습니다. 오늘만큼은 제게 대견하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회사가 준 가장 큰 선물
다시 한번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던 저를 믿어주신 팀장님께, 또 선배라는 이름으로 묶어 부를 수 있는 좋은 어른들께 감사한 마음은 전합니다. 다시 이만큼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을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너무 사랑했던 협의체분들을 떠나는 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경력보다 쌓기 힘든 건 평판이야. 네가 여기를 떠난다는 건 4년 간 쌓은 모든 평판을 두고 가는 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결정해. 근데 너는 어딜 가서도 그만큼은 할 거야. 떠나기로 했으면 뒤 돌아보지 마.
인생이 가면무도회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만 진짜 얼굴로 서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이토록 사랑했던 회사를 떠나며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너무 벌거벗은 모습을 남겨두고 온다는 부끄러움입니다. 어린 저는 경솔했고 오만했고 지나치게 솔직했습니다. 더 오래갈 수 있었을 인연들을 놓아버렸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다음 회사에서는 그 조직에 맞는 가면을 챙겨 써야겠습니다.
회사의 무궁한 발전과 선배들의 안녕을 바라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