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유치해
일에는 최선의 열정을 쏟는 저이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후회할 만한 순간들이 꽤 많습니다. 최선을 다 하지 않으려 애 쓴 순간도 많았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을 그 상태가 두려웠던 것 같아요. 어쩌면 혼자 노력하는 모습이 자존심도 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 하지 않음으로써 어떠한 여지를 두고 싶었습니다. 비겁해요. 부끄럽습니다. 저는 여전히 유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제 상대를 완전히 놓아줄 수 있을까요. 상대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가 내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을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저는 그를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나만큼 그도 힘들었다는 걸 알고 나서야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유치하죠.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반지
요즘의 제 로망은 커플링입니다. 마음 놓고 약지에 반지를 끼고 싶어요. 누군가는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하겠지만, 혹시 모를 인연이 무산될 수 있기에 그건 안 되겠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이성이 있으면 무의식 중에 그의 왼손을 살핍니다. 남자들이 이유 없이 그 자리에 반지를 끼진 않으니까요.
기회
한 사람과의 관계에는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질까요. 저는 세 번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라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칼 같지 못한 사람이라서요. 사람은 변한다고 생각해요. 마음만 먹으면요. 그럼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를 믿어줘야 합니다. 그를 믿고 충분히 기다려야 해요. 변화하려 노력하는 과정만큼 기다려 주는 일도 어렵습니다.
재회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별로 더 나아진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유치한 모습으로 회귀한다는 겁니다.
그제는 전연인과 반년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닌 척했지만 내심 기대를 했어요. 그는 전과는 달라 보였고, 어쩌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반년,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을 고쳐 먹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어요.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에는 일기를 돌아보며 오늘은 조금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마음 먹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방어적이고 그는 여전히 무례했어요.
괜찮은 사람과 맞춰가는 일과 잘 맞는 새로운 상대를 찾는 일 중 뭐가 더 어려울까요? 관계를 시작할 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키, 직업, 외모, 자산같이 눈에 보이는 정량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태도였어요. 삶과 서로에 대한 태도. 깊이 겪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이죠. 종종 소개팅을 나가면 주선자가 이런 말을 하곤 해요. 얘가 진짜 괜찮은 앤 데 왜 여자친구가 없는지 모르겠어. 그럼 보통 제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확실한 단점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반갑습니다. 그보다 무서운 건 슬금슬금 고개를 드러내는 치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단점이라는 걸 배웠거든요.
진짜 사랑은 의도를 넘어선 책임이고 상대의 변화 앞에서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일관성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쉬우나 말을 행동으로 옮겨내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어렵다. 사랑은 받아들이는 훈련이자 동시에 나를 다스리는 훈련이기도 하다. 휘둘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도 존중을 거두지 않는 태도가 사랑을 가능케 한다. ㅣ 유형길
저는 순간의 선택에 충동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신중해지는 사람입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산다는 이동진 평론가와 달리 저는 하루하루는 되는 대로 인생 전체는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저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또 신중하게 살아볼까 합니다.
여러분도 성실한 1월 보내세요. 모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