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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심사를 찾다

혼독 - 혼자라면, 읽을 때다 10

by 리치보이 richboy

1부. 후천적 활자 중독자, 당신도 가능하다


10. 나의 관심사를 찾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나는 종로구 창덕궁 옆 와룡동에 살았다. 1979년의 창덕궁은 비원이라고 불리며 외국 관광객에게만 공개되었다. 하지만 지리를 잘 아는 동네 아이들은 개구멍을 통해 창덕궁 잔디밭으로 들어가서 몰래 야구를 즐기곤 했다.

볕 좋은 5월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동네 아이들과 야구공으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놀고 있는 우리가 신기했든지 한 비원을 관광하던 무리의 관광객들이 사진기에 담았다. 그리고 관광 가이드로 보이는 누나가 우리를 부르더니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찍은 사진을 집으로 보내준다는 말에 주소를 한글로 적어주고 사진 두어 방을 찍었다. 그때 어느 일본 아저씨가 가이드를 통해 1,000원을 주며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했다. 브라보콘이 100원 정도 할 때였으니 1,000원이면 꽤 큰돈이었다.


나는 그 돈보다는 그 일본인 아저씨가 돈을 꺼내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우리 아버지는 담배나 술 심부름을 시킬 때면 항상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줬는데, 그 일본 아저씨는 우리 엄마 핸드백 크기만 한 새카만 장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냈다(지갑은 꽤 고급스러웠고, 그 속에는 지폐가 그득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빠는 왜 저런 멋진 지갑이 없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몇 번인가 아버지에게 왜 지갑이 없는가, 왜 아빠 돈은 깨끗하지 않은가’ 물었고 예의 대답 대신 꿀밤을 맞았다.

이런 것이 각인인가 보다. 그 후 나는 어른들이 돈을 꺼낼 때마다 지갑을 살폈고, 돈을 살폈다. 이 습관은 나중에 부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 일이 있고 20여 일 지났을 무렵 일본에서 소포가 왔다. 소포를 열어보니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아이들의 머리수만큼 사진을 뽑아 보냈다)과 고급스러운 야구 글러브 하나, 그리고 편지가 한 통 있었다. 누구에게 시켰는지 모르지만 정갈한 한글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에는 그날의 추억을 남길 수 있어서 고마웠고, 내가 짝이 맞지 않는 글러브로 야구경기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며 새 글러브를 잘 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나는 왼손잡이였다). 일본 아저씨의 이름은 고바야시였다.

나는 <국화와 칼>을 읽다가 10여 년 만에 고바야시 아저씨를 다시 떠올렸다. 그때 내게 베푼 그의 호의는 과연 ‘다테마에’였는지, ‘혼네’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 사람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때의 일본 여행은 아쉽게도 불발되고 말았다. 나는 ‘군미필자’였고, 그래서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다(1991년 당시만 하더라도 군미필자는 외국을 갈 수 없었고, 군필자라 하더라도 병무청에 신고해야 출국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더 이상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닌, 내가 사는 현실의 진짜 이야기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일본 탐구에 이어 상인(商人) 탐구를 시작했다. 세계 5대 상인으로 알려진 일본 상인, 그중에서도 오사카 상인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부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오래전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일본은 부자학이라는 학문이 있을 만큼 부자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부자’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터부시 했다. ‘돈이 좋다’고 말하면 ‘속물’ 취급을 했고, ‘나는 부자다’라고 말하면 온갖 불법과 탈세 등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 사람 혹은 부동산 투기꾼이나 복부인을 떠올렸다 [1997년의 IMF 외환위기는 한국인의 ‘부자와 돈’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놓았다. 선비의 정신이었던 안빈낙도(安貧樂道)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고, 국민은행 광고에서는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등장했다.].

그랬기에 책을 통해 만나는 일본인의 모습들, 즉 상인을 존중하고 부자를 존경하며 누구나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인들의 진지한 모습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나는 일본 부자에 대한 책을 집중적으로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부자들은 거의 대부분 장지갑을 사용한다고 한다. 장지갑에 넣어둔 빳빳한 지폐들은 돈을 소중히 여기는 부자들의 상징이자 부적이었다.


어쨌든 ‘부자’에 대한 나의 관심사와 궁금증은 내가 책을 고르거나 책을 읽으면서 쌓게 되는 지식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부자들의 습관을 언급한 내용이 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주의 깊게 읽게 되었는데 실제로도 많은 부자들이 돈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세계적인 부자 워런 버핏도 그랬다. 한 번은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였다. 어느 기자는 물었다.

“현재 당신의 지갑에는 얼마나 있습니까?”

세계 최고 부자의 지갑 속이 궁금한 건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워런 버핏은 여유 있는 미소를 던지며 지갑을 꺼내 현금을 세었다. 600달러 남짓이었다. 혹자들은 매일 햄버거와 체리코크를 즐기는 그에게는 턱없이 많은 돈이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들고 다니는 지보 다는 커다란 장지갑에서 잘 정리된 지폐들에 주목했다.


오래전 TV에 재일교포 이종격투기 선수인 추성훈이 나왔는데 일본에서 생활할 때 그는 여성의 핸드백만큼 큰 지갑, 그것도 모자라 블링블링 빛나는 은백색 색상에 샤넬 핸드백 스타일의 격자로 스티치가 된 지갑을 가지고 다녔다. 왜 이렇게 화려한 지갑을 갖고 다니느냐고 PD가 묻자 그는 “보기 좋잖아요.” 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더 압권은 지갑 속이었다. 지폐를 넣는 반대쪽에는 지폐 다발을 묶는 종이끈 한 묶음이 들어 있었다. PD가 무슨 용도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종이끈들은 내가 지금껏 벌었던 돈의 액수를 말해줍니다. 치고받고 싸움하면서 이만큼을 번 거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종이끈들을 부적처럼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계속 이기는 거잖아요.”


나는 지금껏 비즈니스를 하면서 많은 부자들을 만났다. 창업 관련 사업과 부동산업에 종사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들도 꽤 많았다. 직업, 성격,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돈이 많다는 것과 한결같이 고급스럽고 깔끔한 장지갑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자들이 지폐를 지갑에 넣을 때 두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는데, 우선 지폐들을 모두 앞쪽에 넣어둔다는 점이고, 다음은 헌 돈일망정 모서리를 일일이 잘 펴서 넣는다는 점이다.


부자들이 자주 하는 농담 중에 낭중 무일 전 장부무안색(囊中無一錢 丈夫無顔色)이라는 말이 있다. 풀어보면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으면, 사내가 낯이 안 선다’ 정도 될 것이다. 주머니가 홀쭉하면 괜히 궁상맞게 되고, 주머니가 두둑하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게 사람 심리다. 돈이라는 것은 단지 교환수단만이 아니라 이를 소유한 사람의 정신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자들이 장지갑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옛날 동화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자린고비나 구두쇠 영감을 보면 장사를 하고 돌아와 돈을 일일이 다리미로 폈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부자들은 돈도 많지만, 돈을 아끼고 사랑한다. 어쩌면 그들이 돈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보통 사람보다 돈이 많은지도 모른다.

‘부자들의 습관’은 사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더구나 ‘장지갑’과 관련된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네.’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창 시절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한때 노숙자 생활을 했고, 우울증에 걸렸다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부에 매달려 세무사가 된 사람이 있다. <부자들은 왜 장지갑을 쓸까>(21세기 북스)라는 책을 쓴 카메다 준이치로다. 그는 ‘지갑은 인생을 바꾸는 최고의 도구’라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돈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대부분 돈의 입장을 이해하고 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대접을 받아야 돈이 기뻐할지를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접이식 지갑을 사용하던 시절, 지갑과 돈에 늘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경영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지갑을 사용하면 돈이 들어오지 않을 거요. 지갑의 기본은 장지갑이지. 접이식 지갑을 쓰면 그 안에 든 돈이 가엾지 않소?’

당시에는 돈을 단순한 물건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이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장지갑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지갑은 애초에 돈, 특히 지폐를 편하게 넣기 위한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장지갑은 빳빳한 새 지폐를 넣었을 때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쓸데없이 접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접이식 지갑의 경우 남성들은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닐 때가 많은데, 장지갑은 뒷주머니에 넣으면 앉기 불편합니다. 따라서 돈이 엉덩이에 깔리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한편 저자는 본문에서 ‘연봉 200배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가급적이면 비싼 지갑을 사용하라고 말한다. 연봉 200배의 법칙이란 지갑 가격의 200배만큼 연봉을 더 받는다는 것이다. 미신 같은 이 이야기에 대해 저자는 고급 장지갑을 가져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라 말한다. 고급 지갑을 손에 넣는 순간 지갑 주인의 ‘의식’이 미래를 향하게 되고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강력한 의지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지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되어 결국 그만큼 수입이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카메다 준이치로의 이런 설명에서 보자면 어린 시절 만났던 고바야시 아저씨는 틀림없이 부자였을 것이다.


자자, 어쨌든…… 고바야시 아저씨가 과연 부자였는지 아닌지 아마도 여러분은 관심이 없을지 모르겠다. 그건 나의 경험이었고,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배움의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의 관심사를 알게 되면 당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가 알고 싶은 것, 내가 흥미롭게 여기는 것을 발견하고 그 방면의 책을 읽어보자. 그렇게 관심사를 조금씩 넓히다 보니 나중에는 자연스레 경제경영 분야 전체로 관심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최초의 나의 관심사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갔기 때문이다.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찾았다면 그 관심사에 관한 책을 찾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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