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읽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책 읽기가 킬링 타임에 그친다면 과연 그 시간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재미있게 읽었는데 남는 게 없다면?
읽기의 즐거움을 알았다면 이제 귀를 열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귀로 읽는 독서, 즉 배움의 독서이다.
배움의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관심사를 찾는 일이다. 나의 관심사가 경제경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소설 읽기에서 경제경영서 읽기로 갈아타게 되었다. 나를 미치게 했던 궁금증들을 해소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자, 당신에게도 머리를 가득 채우는 배움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국문과 교수님의 책장에서 소설을 꺼내 읽은 지 두어 달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어떤 날은 술술 읽히고 어떤 날은 한 문장 읽기가 가시밭길 걷는 것처럼 힘들었다. 문제는 책을 덮고 난 다음 날이었다. 책을 폈는데 마치 새 책을 만난 듯 낯설었다. 주인공도 처음 보는 것 같고, 소설의 배경도 혼란스러웠다. 「올드 보이」 오대수의 말마따나 “너, 누구냐?”였다.
일본 소설 <대망>(동서문화사)을 읽을 때 몹시 그랬다. “중국에 <삼국지>가 있다면, 일본에는 <대망>이 있지.”라는 선배의 말에 겁도 없이 덤벼들었지만 곧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등장인물의 관계망 속에서 나는 늘 길을 잃고 헤맸다.
제일 힘든 건 이름이었다. 도대체 사람 이름을 외울 수가 없었다. 일본 이름이라곤 ‘비사이로 막가’, ‘물아까와 쓰지마’ 따위의 농담만 알던 내가 <대망>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이름만으로 구분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림 하나 없는 소설이었으니 얼굴도 알 리 없잖은가. 책을 펼 때 마다 하는 말은 ‘이늠이 그늠 같고, 저늠이 요늠 같으니. 나 원 참.’ 30페이지도 못 읽고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후로 한동안 일본 소설은 엄두를 못 냈다. 안되겠다 싶어 독서 스승, 국문과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껏 책을 읽는다고 읽었지만 사실 머릿속에 남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막상 무엇을 읽었는지 떠올리려고 하면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요. 사람 이름도 헛갈리고 당최 영화만큼 또렷하게 남질 않습니다. 제가 책 읽는 방법이 잘못된 걸까요? 아니면 제가 책을 소화할 능력이 부족한 걸까요?”
그러자 교수님은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론을 빌려 독서는 두뇌라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교수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머리를 항아리라고 하고 1권의 독서를 한 바가지의 물이라고 해보자. 한두 바가지 붓는다고 항아리가 가득차지 않는다. 항아리마다 다르겠지만 열 바가지, 스무 바가지, 서른 바가지쯤 채워야 좀 찼다고 느낀다. 물론 여전히 인풋(input)만 있을 뿐 아웃풋(output)은 없지만.
그렇게 꾸준히 채워가다가 마지막으로 한 바가지를 들이붓게 되면 찰랑거리던 항아리가 흘러넘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가 아웃풋(output), 즉 독서를 통해 쌓였던 지식이 밖으로 분출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순간 항아리에서 흘러넘치는 것은 마지막에 부었던 한 바가지의 물이 아니라, 그동안 꾸준히 쌓아왔던 크고 작은 지식이 대류현상으로 뒤섞여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이란다. 기억하든 못 하든 꾸준히 읽었던 게 있었기에 아웃풋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뒤돌아서면 잊어버렸던 그 일본인의 이름이 다 떠오른다는 말인가? 아니, 이때 아웃풋이 되는 것은 내가 자꾸 까먹는다고 끌탕을 했던 그런 낱낱의 지식이 아니라 씨줄과 날줄로 엮인 지식 위의 지식, 즉 지식을 관통하는 지혜라는 것이 교수님의 설명이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은 개별 지식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혜를 갖기 위한 것으로, 지혜의 눈이 생기면 세상은 예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독서가 아웃풋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될 터이니 지금 당장 이름이 안 외워진다고,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교수님의 설명이자 당부였다.
당시 내가 품었던 고민들과 교수님의 대답은 역사 속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어온 것임을 나는 훗날 알게 되었다. 가장 친근한 예 가운데 하나가 다산 정약용과 황상의 문답일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귀양살이를 하던 마흔한 살 때 중인인 아전의 아들 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때 제자 중 한 사람이 황상이었다. 열다섯 살인 황상은 문학과 역사를 배울 때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가 좋지 못하고, 또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공부를 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저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라고 물은 것. 그러자 정약용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도 나중에는 알게 되고, 머리가 뛰어나지 않아도 한 번 알게 되면 쉬 소통되고, 어리석어도 꾸준히 하면 된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된다.”
그 말은 마치 항아리를 채우고 채우고 채우다 보면 어느 순간 아웃풋을 경험하게 된다는 국문과 교수님의 말과 닮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웃풋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느낌과 흡사할까? 예컨대 열심히 일한 뒤 고무장갑을 벗을 때의 홀가분한 느낌이나, 고기 굽느라 연기 속에서 고생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의 숨이 탁 트이는 느낌, 아니면 전기가 나가서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있다가 다시 형광등이 들어올 때 시야가 확 열리는 느낌에 비견할 수 있으려나?
그러나 많은 독서가들이 증언하는 아웃풋의 순간은 이보다 더더욱 놀라운 경험이라고 한다. 이런아웃풋의 경험은 마라토너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과 비슷하다.
러너스 하이란 인간이 뛸 수 있는 육체적 한계 거리인 마의 30킬로미터를 통과할 때쯤 마라토너들이 종종 경험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 순간을 만나면 육체적 고통은 사라지고 마치 폭신한 구름 위를 달리는 느낌이 온다고 한다. 선사들이 선방에서 느끼는 깨달음도 러너스 하이의 일종이다. 즉 화두를 들고 정신을 극한으로 이끌면 일종의 부유감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머리끝부터 꼬리뼈까지 찌릿찌릿해지는 독서의 특별한 체험과 같다는 설명이다. 바로 이 순간이 독서 체험의 최고 경지다.
대학생활 4년 동안 무려 1만여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일본의 다독가 센다 타쿠야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서점에 있다>(에이미팩토리)에서 방대한 양의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쌓아온 지식이 깨달음으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어제까지 평범했던 사람을 별안간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데 이 순간은 독서를 하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온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이 오랫동안 쌓아왔던 수백만 개의 지식 위에 단 하나의 지식이 얹어지는 순간, 통섭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기다란 실로 파편적으로 나열된 사실들을 꿰어내듯, 도처에 흩어져 있던 인과관계와 법칙들이 나의 것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을 읽어도 이해가 되고 지금 읽는 것이 과거에 읽은 어느 한 대목과 결합되며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것이 바로 ‘순간’을 경험한 사람의 변모한 모습이다.”
센다 타쿠야는 물의 끓는점을 예로 들며 이해를 돕는다. 예컨대 물은 100℃에서 끓어서 증기가 된다. 그런데 만약 1℃가 모자란 99℃에서 불을 껐다면 어떻게 됐을까? 인류는 과연 증기 기관차를 발명할 수 있었을까? 증기 기관차가 달리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는 지금과 같았을까? 센다 타쿠야는 이렇게 덧붙인다.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00% 만족이라는 잔에 톡! 하고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순간, 그것이 101%의 감동으로 진화한다.
이 1%를 위해서 사람들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 1%가 없으면 모든 일은 빵점이 된다. 이 1%를 위해 압도적으로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책을 탐독하다보면 자신은 별다른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주위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프로다.”
마라토너의 러너스 하이, 그리고 센다 타쿠야의 1%는 표현은 다르지만 얘기하는 내용은 같다. 이런 독서의 경험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희열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 희열감을 느껴본 사람은 평생 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게 또한 독서가들의 공통된 얘기이다.
나는 그들의 말이 사실임을 과학적인 증거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이 전율을 느낄 때 그의 뇌 속에서는 아주 강력한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감동 호르몬의 이름이 ‘다이돌핀(didorphin)’이다. 다이돌핀은 근래에 발견된 새로운 호르몬으로 엔돌핀처럼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효과가 엔돌핀보다 4,000배 높다는 사실이다.
다이돌핀은 우리가 감동을 받을 때 생성된다. 예컨대 아름다운 음악 선율에 매료될 때, 드넓게 펼쳐진 웅장한 자연에 압도되었을 때, 주체하기 힘든 사랑에 빠졌을 때, 그때 다이돌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독서에 매진하던 어느 날, 하늘이 열리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무릎을 치며 탄식을 터뜨릴 때, 즉 마지막 한 바가지의 물이 항아리를 흘러넘치게 할 때도 다이돌핀은 분비된다.
알다시피 다이돌핀은 엔돌핀과 같은 체내 마약이다. 한번 마약을 맛본 사람들은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하려고 한다. 그래서 책으로부터 못 벗어난다는 말이다.
얘기가 조금 벗어났는데 어쨌든 교수님께 ‘항아리론’을 듣고 나오던 날 ‘내게도 과연 그런 순간이 올까?’ 하고 생각했다(그때는 교수님께 하산을 명받기 훨씬 전이었다.). 그때가 온다면 과연 언제일까?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찾아온다면 그 순간이 가급적 빨리 오기를 바랐다. 끈기 없는 나로서는 언제 어떻게 책 읽기를 포기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끈기는 없는 반면 고집은 염소 고집이라서 한 번 고개를 돌린 것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 나이기에 독서의 참맛, 즉 배움이 주는 독서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면 책과는 절대 멀어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