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에세이(7) - 대학생 시절을 관통하는 키워드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의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며 벼룩시장 같은 지역 정보지에서 구인 정보를 얻었던 것을 힌트 삼아 직접 구직 광고를 내기로 하였다. 다른 아르바이트와 비교하면 시간 대비 보수가 괜찮게 여겨졌던 과외를 해보려는 생각이었다.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2주에 한 번 발행되는 정보지 구직란 한 귀퉁이에 연락처와 학교와 학과를 기재하고 과외를 구한다는 광고를 낸 것이다. 당시는 개인 휴대폰이 대중화된 시절이 아닌지라 삐삐 번호를 남겨 연락을 받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연락을 받지 못해 역시 과외 알바도 쉽지가 않다 싶었는데 얼마 후 조금씩 연락이 오기 시작해 여름방학 끝나기 직전 첫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도 겨우 스무살, 중고생과는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았다. 평소 동생들이 많아 연상보다는 연하와 얘기하는 것이 더 편했던 나를 아이들은 비교적 좋아했던 것 같다. 첫 과외 때는 매우 긴장했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걱정했는데, 경험이 쌓일수록 조금씩 편해졌다.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주구장창 과외 알바를 하게 되었다. 다른 알바도 많이 경험해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생각으로만 지나갔다. 일주일에 2번 가서 2시간씩 공부를 가르치면 25~30만원을 벌었던 고수입 일을 제치고 굳이 다른 알바를 뛰어들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보통 2개 정도의 과외를 했던 것 같고, 이 패턴은 대학생 시절 내내 이어졌다. 일년이 넘게 가르쳤던 학생이 서넛 있었고, 과외 학생이 친구를 소개해준 적도 있었고, 엄마와 친한 동네 이웃 아주머니 딸을 가르쳐보기도 했다. 과외가 끊기면 또 다시 벼룩 시장에 광고를 내며 그런 식으로 과외는 계속되었다.
과외를 하러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배웠던 것들이 참 많다. 다른 사람들의 가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 거의 처음으로 알게 됐던 것 같고, 비슷하게 혹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안나 카레리나'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의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부모가 예의 바르고 화목한 집의 아이들은 대부분 밝고 긍정적이었고 유쾌하였다. 왕년에 한 가닥 하셨을 것 같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고 나오시는 어머니가 계셨던 집 아이들은 어쩐지 날라리가 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나는 담배를 피지 않지만, 흡연인 친구도 있고 개인의 기호이기에 존중한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는 지금 생각해 보면,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은 정말 시대를 초월한 명언인 것이다.
가장 최악의 케이스는 세 번 만에 과외비를 돌려주고 나왔던 집이었다. 의사 부모님을 둔 부유한 가정의 남자 중학생이었고 다녀본 집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실내는 고급스럽고 멋진 가구와 장식품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학생 어머니는 아들이 좀 산만하다고 했었는데, 수업을 해 보니 산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끊임없이 딴 짓을 했고, 뭘 얘기하면 엉뚱한 말로 되묻거나 못 들은 척 하거나 하기 싫다고 우겨 진땀을 뺐다.
세번째 방문했을 때였나, 아마도 주말이었던 것 같다. 과외를 하러 갔더니 아이는 집에 없었고, 어머니와 좀 얘기를 해보려 하니 심하게 아파서 링겔 맞으며 안방에 누워있어 만나기 어렵다고 아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이 과외는 더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을 바탕으로 한 판단 하에 받은 과외비를 챙겨서 가져왔던 것 같다. 아이 아버지를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 죄송하지만 과외 수업은 힘들 것 같다고 돈을 돌려드리고 나왔다. 이후 어머니도 아이도 당연하게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의 예의와 미안함을 표현한 사람은 그 집에서 아버지가 유일했던 셈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 학생은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그 집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히 수업이 힘들 정도로 아이가 산만해서는 물론 아니다.
그 때는 아직 휴대전화가 널리 대중화 되기 전이었고, 무슨 이유였는지 그 집에서 내가 전화를 써야할 일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 학생의 여동생 방에 있는 전화를 썼어야 하는데, 그 아이가 내가 전화를 쓴다는 사실 자체를 어찌나 싫어하는지 한순간 한순간이 굉장히 기분 나빴다.
전화기가 있는 곳이 거리가 좀 있어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기 위해 줄을 좀 땡기니 본체를 책상에 고정시키려 꽉 잡고 있었고, 내 손길이 닿은 곳을 무슨 벌레라도 있는 것처럼 닦아내듯이 만지작거렸다. 어찌 보면 사소한 행동이라 할 지 몰라도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불쾌한 경험이었다.
멋지게 꾸며진 그 집에서는 누구도 웃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인상을 쓰거나 한숨을 쉬거나 뭔가에 불안해 하는 듯 하였다.
이 글을 쓰며 가르쳤던 여러 아이들을 떠올려 보니, 어떤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소식이 매우 궁금한 학생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JW, 웃는 얼굴이 너무나 예쁘고 순수하고 착한 남자 아이였다. 늘 밝은 성격에 붙임성이 있어 나를 많이 좋아하고 따랐다. 위 최악의 사례와 비슷했던 점은 집이 굉장히 유복했다는 것인데, 집안 분위기는 정반대로 화기애애하고 화사했다.
늘 웃는 얼굴로 과외 선생에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주셨던, 우아한 JW의 어머니가 지금도 떠오른다. JW는 마지막 수업 때 엉엉 울면서 아쉬워했는데, 지금은 다 큰 어른이 되어 있겠지.
YR, 아프셨던 어머니를 일찍 잃고 아버지가 직접 육아와 살림을 하시는 한부모 가정의 씩씩한 큰딸이었다. 처음엔 엄마가 없다고 해서 그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내심 마음이 쓰였는데,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챙기는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YR과는 과외가 끝나고 나서도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 받다가 연락이 끊겼다. 공부를 잘했기에 좋은 대학을 나와 지금은 가정을 꾸려 엄마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그렇게 용돈을 번다는 것은, 참 좋았다.
그런데 계속 과외를 해서 돈을 벌고 작게나마 경제적 독립을 했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내가 쓸 돈을 내가 번다는 것,
참 잘해 왔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시 보이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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