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신입사원

머니 에세이(10) - 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는 것

by 리치레몬


그만두는 선임은 그 자리에 뽑힌 신입사원인 나에게 한 달 동안 업무 인수인계를 하게 되었다. 불만을 가지고 그만두는 사람이니 선임이 가진 회사와 상사에 대한 험담과 불평도 화려했지만, 굳이 타인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아쉬운 부분은 많았다.



여성이 대부분인 회사가 가지는 단점도 있을 터이고, 업무도 조금은 특수한 편이다보니 그간 꿈꾸던(?) 직장 생활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선배들은 그보다 윗 선임들을 '언니'라고 불렀고, 회식은 아예 없었다. 참고로 나는 현재 20년 가까이 일했는데 사회생활에서 만난 사람을 언니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스타일이다.



팀 플레이가 필요없고 혼자서 몇 시간이고 컴퓨터와 사전을 들여다 보며 하는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말 한 마디도 안할 수 있었다. 업무상 외근을 가거나 누구를 만나기는커녕, 전화 한 통 할 일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 일, 그 때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적고 보니 참 여러 가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워라밸과 칼퇴근이 지상 최고의 가치이며 회식이란 없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최상의 직장이 아니었다 싶다.





문제는, 나는 90년대 생이 아닌 70년대 생이고(...) 당시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하고 의욕 넘치는 신입 사원이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었고,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신나는 사회 생활을 원했다. 따라서 활력 없는 회사 생활이 마음에 들리 없었다.



다 좋은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으며 괜찮은 연봉에 칼퇴근이면 만족해야지, 참아야지, 여러 번 스스로를 다그치고 노력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더이상 그 회사를 못 다니겠다 싶은 작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인수인계 후 떠난 선임의 가장 큰 불만은 회사 소장님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 내 블로그가 어느날 갑자기 유명해져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희망 사항)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겠다. - 상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여러 모로 참 특이한 분이셨는데, 거의 매일 영문 서신 결재를 위해 소장님을 뵐수록 나와는 맞지 않는 상사라는 것을 느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그 분 또한 나를 그다지 탐탁치 않아 한다는 것 또한 느낌적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1년 가까이 내가 너무 바라는 것이 많은 걸거야, 라고 참으며 지내던 어느 한가한 오후였다. 여느 때처럼 자리에서 일을 하다가 핸드폰의 게임 메뉴에 들어갔다. 그 때가 2001년이었나, 당연히 2G에, 흑백 폴더폰이었다.



말이 게임이지 옛날에 유행하던 다마고치처럼 하루에 몇 번 들어가 모이? 먹이를 주고 나오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별 생각없이 폰을 눌러 밥을 주고 고개를 돌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소장님 얼굴과 딱 마주친 것이다.



소장실과 내가 있던 사무실은 층이 달랐기에 결재 때 말고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소장님은 가끔 예고없이 불쑥 올라와 직원들 사무실로 시찰(?)을 나오곤 했는데, 하필이면 그 시점에 딱 걸렸던 것이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사무실에 들어왔고, 마침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던 나는 소장님을 보지 못했고 마침 딴 짓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시말서 써 와."



그 말 앞에 게임을 해? 뭐하는 짓이야? 이런 얘기가 있었던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소장님은 분노에 찬 낮은 목소리로 시말서를 써 오라고 짧게 이야기했고, 나는 너무 놀라고 멍해져서 잠시 동안 현실을 자각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그 분은 제왕적인 존재였고, 기침 하나에도 떠는 직원들이 있을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다. 강산도 두 번 바뀔 만한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존재를 잊고 살지만, 당시에는 소장님과 마주하고 싶지 않고 회사 가기 싫어서 밤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시말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대처해야 할 지 얘기해주는 선배는 없었고 다들 책상만 보며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싸늘하게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에서 누구에게 뭘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장님은 휙 둘러보고 방을 나가셨고,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악수를 두었다. 그 날 받아야 하는 결재 문서를 들고 곧이어 소장실에 간 것이다. 어차피 결재받을 시간도 다가왔기에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매일 수차례 결재를 받는 소장님은 처음에는 서류만 보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일갈을 날렸다. 회사가 장난이냐고 했는지, 시말서를 왜 안 가지고 왔냐고 했는지 그 말 자체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일 것이다.


암튼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도 평생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스크림(말 그대로 괴성...)을 듣고 나는 멘탈이 털린 상태로 자리에 돌아왔다. 파국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그 상황이 딱 그러했다.



좀 억울하기도 했지만 잠시라도 딴 짓을 한 것은 사실이기에 내 잘못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눈 밖에 난 직원인데 이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으니, 여기 있으면 정말 내 미래는 없는 것인가,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안 그래도 스스로를 달래가며 겨우 회사에 다니던 참에 이런 결정적인 계기가 생긴 것이었기에 급기야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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