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갑순이

제10화 천사같이 착한 우리 아가

by 리치만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남 탓, 세상 탓만 하며 나의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었고,

과거에 얽매여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거울 앞에 섰다.

한동안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리리링—


“여보세요?”

“어, 준혁아~ 뭐 하냐?”

“네, 대현이 형. 안녕하세요.”

“바쁘냐?”

“아뇨, 집에 있어요.”

“아,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 너 프로툴 다룰 줄 알지?”

“네, 기본적인 건요.”

“영통 걸 테니까 좀 알려줘.”


대현이 형은 언더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형이다. 실력만 보면 메이저급인데,

왜 소속사에 들어가지 않는 건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일한 외계인 같은 존재다.


영상 통화로 대현이 형 컴퓨터 화면을 보며 기본 설정들을 알려주고,

툴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간단히 설명해줬다. 정신없이 설명하다 보니,

내 휴대폰 카메라가 내 얼굴을 비추는 걸 깜빡했다.


“야, 너 자다 일어났냐?”

“네?”

“머리 꼴 좀 보소~ 못 쓰것네.”

“아, 하하하. 그렇네요.”

“야, 레게 하겠다는 놈이 드레드 정도는 해야지. 형한테 와라, 해줄게.”

“네? 형, 드레드 땋을 줄 아세요?”

“그럼 인마. 머리 땋는 기구 같은 거 다 있으니까 와.”


뭔가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형… 저 드레드 할게요.”

“잘 생각했어. 주말쯤에 오고, 오기 전에 머리 탈색이나 싹 하고 와.”

“탈색이요? 그 노란 머리요?”

“그래야 머릿결이 헐거워져서 드레드가 잘 나와.”

“아… 네. 알겠어요.”


그때 갑순이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을 뻗으면, 갑순이는 자동으로 앞발을 들어 안기려고 한다.

늘 하던 포옹이라, 앞발을 들어주는 건 갑순이에게 거의 반사 운동 같은 거다.

“갑순아~ 아빠가 레게 머리 하면 어울릴까?”


갑순이는 내가 레게 머리를 하건, 장발을 하건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크고 맑은 눈망울로, 시저 달라는 사인만 보내고 있었다.

“못된 노므 가시내…”


주말이 되기 전에 머리 탈색을 하고, 드레드락에 어울릴 만한 티셔츠도 몇 벌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레게를 하려면 ‘나 레게 합니다’라는 티를 내고 싶었다.

밥 말리가 그려진 티셔츠 몇 장을 샀다.

티셔츠를 사고 나니, 집도 슬슬 그렇게 꾸미고 싶어졌다.

레게와 관련된 깃발도 몇 개 더 주문했다.


애견용 사자 가발도 하나 샀다.

레게의 상징이 사자인 만큼, 우리 갑순이에게도 어울릴 것 같았다.


며칠 뒤, 주문한 것들이 하나둘씩 택배로 도착했다.

티셔츠들은 생각보다 꽤 예뻤고, 마음에 들었다.

사자 가발을 갑순이에게 씌워봤더니, 제법 폼을 잡는다.

진짜 사자처럼 위풍당당한 자세가 나와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으구~ 우리 갑순이! 이렇게 예쁜 게 어디서 왔을까~?”


주말이 되어 대현이 형 집으로 갔다.

무려 8시간 동안 머리를 땋았다.

두피가 당겨져서 무척 아팠지만,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드레드락이 완성되고 나니, 거울 속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왠지 힙하고, 간지 있어 보였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흔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관종끼가 다소 있는 나에게는 딱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


입원 그리고 퇴원.

상태가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근처 카페에 가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노트에 낙서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내 멘탈 상태가 완벽하진 않았기에,

사람이 붐비는 시간은 피해서 한가한 때를 골라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카페를 가든, 집 앞 편의점을 가든, 갑순이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내 옆에 갑순이, 갑순이 옆에 내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단짝처럼, 거의 붙어 다녔다.

일하러 가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외에는 늘 함께였다.


어느 날, 집 앞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렸다.

크기나 움직임을 보니 이제 막 성묘가 된 듯했다.

사람 손을 탄 것 같진 않았지만, 나와 마주쳤을 때도 반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 몇 번 먹을 것을 챙겨줬다.

고양이들이 먹는 캔을 따서 줬고, 그게 고마웠는지

내가 대문을 나서거나 들어올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가능해졌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품에 안아봤더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당황한 듯했지만, 곧 나를 믿고 몸을 맡기는 모습이었다.


길고양이와 친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나에게 무척 관대했다.

그래서 문득, 안은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갑순이가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만약 갑순이가 모견 수진이를 닮았다면, 짖어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순이는 짖지 않았다.


고양이를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갑순이는 가까이 다가가더니, 꼬리를 살랑이며 반갑다는 인사를 건넸다. 고양이는 조금 놀란 듯 경계했지만, 갑순이의 순한 태도에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요렇게 순해가지고, 테리어가 맞긴 한 거여?”


영화 속 여전사 ‘갑순이’처럼 용맹하라고 이름도 똑같이 지어줬는데…

그냥 순하게만 살아가는 우리 갑순이.

왠지 짠하고, 고맙고, 기특했다.


뉴스에서는 코로나19 소식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비상 아닌 비상 상태였다.


외출 시에는 마스크 착용이 필수였고,

어디를 가든 QR 인증은 이제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밤 10시가 되면 술집이나 식당은 일제히 문을 닫았고,

거리는 점점 유령 도시처럼 텅 비어갔다.


코로나19로 인한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특히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다행인지, 슬픈 일인지…

나는 우울증이 이미 오래전부터 내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이라

이 상황이 크게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사람 없는 거리에서

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한 채,

갑순이와 실컷 산책할 수 있어서 나름 괜찮았다.


이걸 요즘 말로 ‘웃프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렇게 갑순이와 한가로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강아지는 걸음걸이도, 행동도 조금 느릿해 보였다.


“강아지 귀엽네요. 몇 살이에요?”


“올해 열두 살이에요.”


“아… 우리 강아지는 이제 아홉 살인데…”


“아직 건강하네요. 우리 애는 이제 노견이라…”


갑순이는 아주머니 강아지에게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려 했지만,

그 강아지는 아주머니 뒤로 숨으려 했다.


“얘가 나이가 들더니, 저런 젊은 강아지들 보면 자꾸 숨고 그러네요…”


아주머니 표정에는 속상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견주들끼리는 강아지들이 인사할 수 있도록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통인데,

아주머니는 자신의 강아지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음 아픈 듯했다.


우리 갑순이도 이제 아홉 살이니, 노견이라면 노견이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건강하고 밝게 지내주고 있다.


지금까지 아픈 적 한 번 없이,

늘 착하고 순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건강은 있을 때 챙기는 거라고 했던가.

산책 나온 김에 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동물병원에 들어서자, 수의사님과 직원분들이

갑순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이구~ 갑순이 왔구나! 어쩐 일이세요?”


“올해 아홉 살인데요, 아픈 데는 없지만… 그냥 걱정돼서요.”


수의사님은 갑순이 몸무게를 재고, 눈과 입 안 상태도 확인했다.


“더 정확히 보려면 건강검진을 받는 게 좋아요.

마취를 하고, 피검사부터 진행하는 식으로요.”


“마취요?”


“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마취하고 스케일링도 같이 하고

피검사로 질병 유무를 미리 확인할 수 있어요.

노령견이면 1년에 두 번 정도가 적당합니다.”


“네, 그럼 할게요.”


“마취하고 검사하고, 다시 깨는 데까지 3시간 정도 걸리세요.”


“아, 그럼 갑순이 여기 맡겨두고 집에 다녀올게요.”


“네, 그러셔도 됩니다.”


카운터에서 비용을 결제하고, 다시 갑순이 곁으로 돌아갔다.


“아빠 금방 올게.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


갑순이를 꼭 안아주고 병원 문을 나섰다.


3시간 동안 뭘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낙원상가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을 타고 종로로 향했다.


필요한 오디오 케이블 몇 개만 간단히 사고,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왔다.


갑순이는 이제 막 마취에서 깬 상태였다.


“갑순이 보호자님, 갑순이 이름 너무 잘 지으셨어요.

어쩜 이렇게 순할 수가 있죠?”


수의사님은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정말이지, 너무 순해서 대견하고

너무 순해서 걱정스러운, 우리 착한 갑순이였다.


나는 갑순이를 위해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매년 1월 3일, 갑순이 생일이 오면,

시저를 모아서 작은 케이크처럼 만들어주곤 했다.


갑순이도 나에게 어떤 걸 바란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옆에 있어주고,

쓰다듬어주고,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예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봐 주었다.

“갑순~!”


이름만 부르면 우다다닥 소리를 내며

내 품으로 쏙 안겨드는 갑순이.


내 얼굴을 핥고,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

애교를 보고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가끔은 두루마리 화장지를 물어뜯어 방 안을 어지럽히거나,

휴지통을 엎는 사고를 치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이자 동반견이었다.


코로나19 사태는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몇 년 전의 신종플루나 메르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감염 속도가 너무 빨랐고, 외출 자제와

모임 금지 요청이 연일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코로나로 인해 직장을 쉬었다가,

다시 출근하는 일이 반복됐고,

자연스레 월급도 들쭉날쭉해졌다.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자영업자들 중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뉴스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조금 경제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옆에 갑순이가 있는 한 나는 괜찮았다.


담배는… 말보로에서 디스로 바뀌었지만,

담배를 끊는다 한들, 갑순이의 프리미엄 사료와

시저는 반드시 지켜줘야 했다.


그렇게, 세상이 멈춘 것 같던 시절에도

내 옆엔 갑순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가엾은 길고양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오는 사람에게나

항상 착하고 순하게 반가워 하는 우리 갑순이…


“너 천사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