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다. 임금 노동자는 매일 새벽잠을 이겨내고, 출근길 지옥철을 견디며 일과 인간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참는다. 그리고 프로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자기 계발에 힘쓴다. 주말에는 출근복을 저렴하게 구매하기 위해 1시간 넘게 운전해서 아울렛 매장을 간다. 임금 노동은 시간, 노고, 수모가 수반된다. 그늘에 가려진 노동은 경제 발전에 기여하지만, 노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반 일리치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라고 불린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다수의 책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또한 사회· 경제· 역사· 철학· 언어· 여성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통찰을 남겼다. 1960년대 이후 ‘발전’이라는 말은 ‘자유’와 ‘평등’에 버금가는 지위(p.19)를 얻는다. “경제발전은 사람이 무언가를 하는 대신 무언가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 노동은 “삶과 쾌락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유일한 원천(p.32)“인 것처럼 보인다. 일리치는 인간의 노동을 세 가지로 나눈다. ‘자급자족 노동’, ‘임금 노동’, ‘그림자 노동’이다. 자급자족 노동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직접 생산한다. 임금 노동은 남이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대가를 받고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그림자 노동은 임금 노동자 뒤에서 임금 노동을 지원하는 무보수 노동이다. 가사 노동이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인 사례다.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고,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경제활동을 했다. 남성이 풀을 베면 여성이 긁어모으는 형태의 성역할은 존재했지만, 노동에는 차이가 없었다. 산업화 이후 노동이 분업화되면서 성별의 경제적 역할과 노동의 질이 나뉜다.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 중요하게 간주되는 노동과 중요하지 않은 노동,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 등으로 분류하기 시작한다(p.44). 이러한 현상은 발전과 고용을 추구하는 사회의 필연적 결과다(p.45). 산업 노동은 생계를 책임지는 일하는 남자와 집안일하는 여자라는 커플을 창조시켰다. 남성이 받는 임금은 삶의 필수 요소이고, 여성은 가정의 관리자라는 임무를 맡겨 의무를 다하게 했다. 자급자족을 박탈당하고 노동 시장의 주변부로 밀려난 가정주부는 강제적 소비 조직의 일원으로 지겨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p.200).
근래에는 생산과 소비의 역할을 구분하여 유지하기가 어렵다(p.46). 무급 노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비공식 경제활동의 가치가 화폐로 환산되고 있다. 여성은 전업 주부가 되거나 임금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산업경제는 성역할을 구분하기보다는 성 통합을 추구(p.46)하는 방식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이 생산 활동을 하려면 보육, 교육, 의료, 음식 등 산업적 서비스를 지원받아야 한다. 가사 노동은 임금 노동의 필수적인 보완물로써 오랫동안 그림자 노동을 대표하였지만, 이제는 대가를 지불하는 하나의 서비스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강제적인 소비를 늘려서 이익을 추구한다. 자본가와 관료는 임금 노동보다는 그림자 노동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이전에는 성으로 결합된 가족을 대상으로 그림자 노동을 예속시켰다. 오늘날에도 전문가 집단은 이러한 예속을 창안하고 있다. 이를 테면 '효율성'이라는 이름 하에 무인 서비스, ‘보안’이라는 이름 하에 주기적인 비밀번호 변경 등 자기네 서비스의 필요성을 입증하며 그에 상응하는 그림자 노동을 고객에게 부과하고 정당화한다(p.202). 따라서, 그림자 노동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할 것이다.
산업화 이후 노동의 가치, 긍지, 즐거움을 운운하지만 그 노동은 남을 위한 노동이다. 노동의 분업화는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 모두 인간을 소외시킨다(p.201). 일 자체에 대한 즐거움이 상품을 얻는 기쁨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일시적이다.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것보다 사는 게 효율적이라는 인식은 상품 없이 지낼 수 있는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사라지게 한다(p.32). 우리는 임금 노동자로서 소비자로서 존재해야 하는가. 일리치의 지적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리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비판만 하지 않고, 그가 실천한 자급자족 노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소비재를 사는 대신 사람이 몸소 제작을 하고, 산업적 도구 대신 공생 공락의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p.29). 산업경제 사회에서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통근할 수 있는 사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발전'이 아닌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자급자족 노동은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든다. 노동자가 도구와 자원을 자유롭게 소유하고, 노동의 산물인 재화와 서비스는 창의적 활동의 수단이 된다(p.29).
햇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산업적 인간이라는 이상이 사그라지고, 그 사상을 보호하던 금기도 사라졌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함정에 빠진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양산할 것이다. 집에서 만든 음식과 냉동식품의 맛, 정성, 만족도는 분명 다르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 수단을 통제하고, 개성을 발휘하는 사회를 일리치는 제안한다. 노동 자체가 삶의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자의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