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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an 26. 2021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우리는 이따금 이탈을 꿈꾸지만, 여전히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뱅뱅 돌고 있다. 삶의 전환은 각자 다른 모양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천천히 진행되고, 어떤 이들은 폭풍우가 휘몰아쳐 단숨에 인생이 바뀐다.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오.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소.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소(p.51).


어느 날 어떠한 설명도 없이 남편이 편지만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면 기분이 어떨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하고 있다. 몸은 오랫동안 화가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었고, 파리에 머물면서 타히티에서 비참하게 죽은 고갱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는 ‘원시와 야생’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한 고갱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고갱이 아내를 두고 그림을 그리겠다며 떠나지는 않았다.


작가인 ‘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가족을 버린 스트릭랜드가 무책임하고 혐오스럽다. 동시에 나이 사십에 그림을 그리려는 동기가 궁금했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p.69).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오직 그림에만 쏟는다. 예술에 대한 열정은 자신의 안정적인 삶, 가족, 건강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 심지어 타인까지도.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화가 스트로브는 병든 그를 집에 데려와 정성껏 보살폈지만 결말은 가정이 파괴되고, 아내를 잃는다. 스트릭랜드는 그와 그의 아내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그들 각자가 원해서 한 일이라며 그들의 문제라고 일축한다. 그는 마치 자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스트릭랜드는 이미 육체를 벗어나 예술을 향해 뜨겁게 타오르는 영혼 그 자체였다.

  

《달과 6펜스》를 명작이라고 하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이 소설이 읽히는 이유는 제목의 힘이 크다. ‘달’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상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6펜스’는 돈과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실의 삶을 의미한다. 일상을 바쁘게 살다보면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우리는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또한 지금의 삶을 내려놓고 내면의 목소리에 이끌려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세계를 이탈하여, 달의 세계로 넘어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걸(...) 쇠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해요. 스트릭랜드를 굴레지어 놓았던 그 열정도 사랑처럼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죠(p.276).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예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그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스트로브의 말처럼 운명의 신에게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안전한 삶을 사는 게 지혜일 수 있다. 그는 예술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스트릭랜드는 오랜 방황 끝에 타이티섬에 도착한다. 원시와 야생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에서 그는 열일곱살 타이티 원주민 아타와 결혼한다. 원주민의 삶을 살며 독창적인 예술을 펼쳤고 삼년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병에 걸려 죽어가고, 아타는 그의 곁을 지킨다. “당신은 내 남자고 나는 당신 여자예요. 당신이 어딜 가든 나도 따라가요”(p.287). 그는 죽음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지만, 아타의 말에 두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예술에 사로잡힌 고독한 순례자이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방식으로 곁에 붙잡아두려 했다. 하지만 아타는 달랐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예술 혼을 모두 담아 최후의 그림을 그린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스트릭랜드와 몇 번의 만남,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엮어서 들려준다. 스트릭랜드가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구축하였는지, 그 과정에서 느낀 좌절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설에는 나와있지 않다. 그는 죽은 후에 비로소 자신의 그림을 인정받아 천재화가로 불린다. 현실너머의 삶을 살았던 그를 사람들은 그저 신비한 동경의 대상으로 여긴다.


우리는 달과 6센스의 세계 중 어디쯤에 있을까. 두 세계가 공존할 수는 없을까. 반복되는 삶의 궤도를 돌다보면 우리는 이탈을 꿈꾼다. 궤도를 이탈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스트릭랜드의 모델인 고갱은 최후의 작품으로《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남겼다. 그는 마지막에 자기 자신의 길에 도달했고, 영혼의 휴식을 맞이했다.


이 글을 마치며 시 한편이 스쳐지나간다.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궤도를 이탈해 떨어지는 별동별은 참 아름답다. 이따금 밤하늘을 보며 별동별을 꿈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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