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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Feb 25. 2021

여전히 미성년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다. 첫사랑은 문학,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는 첫사랑을 맞이했고 성장했다. 첫사랑, 그 사람은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는가. 기억 속 이미지는 소중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첫사랑이 과거의 모습으로 간직되길 원하고, 실제와 안전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우리 사이에 벌어진 모든 것을 떠올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는 열다섯 살인 ‘나’와 서른여섯 살의 그녀의 만남, 이별, 재회 그리고 다시 이별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는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이 책은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 이후 현대 독일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소설이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열다섯 해에 만난 그녀의 이미지는 강렬했다.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그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와 “꼬마야”하고 부르며 두 팔로 끌어안았다(p.8). 스타킹을 신는 조용한 그녀의 리듬은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 그것은 다리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바깥세상을 잊어버리라는 요구였다(p.19). 그녀는 그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p.31)과 안정감(p.46)을 주었다. 

     

책 읽어주기는 그들의 첫 대화가 있던 날부터 시작했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나란히 누워 있기는 만남의 의식이다. 미하엘은 책 속 등장인물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집중력 있게 책을 읽었다. 한나는 이야기에 푹 빠져서 동조하기도 격분하기도 했다. 책 읽어주는 행위는 그와 그녀가 대화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오랫동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겨두었던 그는 이제 그녀를 이끈다(p.65). 이후 미하엘은 한나를 배반하기 시작했고, 오만한 태도가 점차 익숙해졌다. 그는 요지부동의 인간처럼 행동했다(p.95). 한나가 자신을 찾아온 날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한나는 떠났고, 미하헬은 자신이 그녀를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하엘은 대학생이 되었고, 법정에서 한나를 다시 만난다. 강제수용소에 대한 재판이었고, 그녀는 강제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 그 당시 전후세대는 나치 시대에 끔찍한 사건을 밝혀내고 고발해야 하는 임무에 확신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 세대인 그들의 부모에게 수치의 판결을 내렸다(p.99). 미하엘은 그녀의 체포가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나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몰랐다(p.119)고 대답하며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p.137)하고 묻는다.     


한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 늘 싸워왔다(p.144). 재판은 보고서를 쓴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녀는 점점 불안해 보였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p.141). 그녀는 자신이 문맹임을 밝히기보다는 범죄자임을 자백한다(p.143). 한나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 보일 수 없었고, 그것은 안타까운 그녀의 싸움이었다(p.144). 그는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가 될 만큼 허영에 차고 사악한 여자였나?(p.143).      


미하엘은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또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170). 그는 철학자이자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재판관도 만나보지만 달라진 건 없다. 미하엘은 문득 일상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그녀의 일에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이전 세대에게 나타났던 마비 증세를 느끼며 한편으로는 기뻤다. 이제 그는 일상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p.174).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p.199)하고,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미하엘은 그녀가 자랑스러웠고 동시에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 전체가 가엾게 여겨졌다(p.199). 하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계속해서 책을 읽고 카세트테이프를 보낸다. 그는 그것이 자신과 그녀와의 이야기하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p.201).     


미하엘과 한나는 아주 오래 만에 만나 대화를 나눈다. 

"꼬마야 너 무척 컸구나."/ "책 많이 읽어요? "/ "조금. 네가 읽어주는 걸 듣는 게 훨씬 좋아."/  "당신이 글을 읽는 법을 배운 것을 알고서 나는 너무 기뻤고 또 당신에게 감탄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도 정말 멋졌어요!(p.207~209)."     


미하엘은 여전히 한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나는 그를 사랑했고 이해받고 싶었다. ‘문맹의 고통’이 아닌 ‘문맹’인 것을 감추고 싶은 마음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게 그녀의 비밀을 감추려고 감옥에서 눈물겹게 글을 쓰고 익혔다.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p.153). 철학자인 아버지가 했던 말을 미하헬은 간과했다. 그는 그녀의 품위를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미하엘은 한나에게 이해가 아닌 절망을 건넨 셈이다.  

   

그는 과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미하엘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인생은 사랑과 죄의식, 이해와 유죄판결, 그리움과 수치 등 한 여자를 사랑한 데서 따르는 이해와 책임이 담겨있다. 이 소설은 남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독일 전쟁 전후세대 간의 갈등으로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우리가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은 모두 이해와 책임이 따른다. 때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하지 않은 행동도 있다. 과거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과거와 대화를 계속해서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온전히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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