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전사로 복무하던 때였다. 구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 너른 파밭 옆을 지나갔었다. 늦은 봄이었다. 파도 꽃을 피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속이 텅 빈 파가 꼿꼿이 서서 무거워 보이는 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엄마가 떠올랐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속을 깡그리 비우고 살아가는 엄마. 자식을 위해 속을 다 비워내고도 꼿꼿이 자신을 지탱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구소은, 무국적자, 바른 북스, 2018. p.187).
구소은의 《무국적자》 책을 읽었다. 주인공 기수가 파꽃을 보며 엄마를 생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어릴 적에 파꽃을 본 적이 있다. 파밭에 줄 맞춰서 서 있는 긴 파대 위에 핀 하얀 꽃은 마치 왕관을 쓴 듯 예뻤다. 하얀 왕관처럼 빛나던 꽃이 자신의 속을 비우고 비워서 피워낸 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보통 꽃은 생애 절정의 순간에 아름답게 피어나고 씨앗을 남긴다. 하지만 파꽃은 생애 막바지에 피어난다. 파꽃이 피면 파대는 질겨지고, 속이 텅 비어서 먹을 수 없는 파가 된다. 이제는 속이 텅 비어 희고 둥근 모양의 꽃을 머리에 이는 거 조차 힘이 들었을 터인데, 여전히 꼿꼿이 하늘을 향해 서 있다.
파꽃의 꽃말은 인내이다. 파향은 꽃이 아닌 온몸에서 물씬 난다. 근처에 있으면 눈과 코가 맵다. 파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을 비웠던 삶, 녹록지 않았던 인생이 파향처럼 진하게 느껴진다. 파꽃에서 어머니의 삶을 연결시키는 건 참 자연스럽다.
'파꽃'을 대상으로 쓴 시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다. 안도현, 이해인, 이문재 님의 시도 좋지만, 좋은 동시가 있어 소개한다.
파꽃
- 이안-
파밭에 파꽃이 폈다
파꽃을 이응처럼 둥글다
곧 밭주인이 씨앗을 받으려
팡팡 핀 파 대가리를
몽땅 꺾어 가면
파는 다시 이응을 갖고 싶어
하얀 파뿌리가
더 하얘질 때까지
ㄱㄴㄷㄹㅁㅂㅅㅇ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 상단 이미지: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