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의 제분소는 어떻게 블루오션을 만들 수 있었을까?
레드 오션(Red Ocean), 수많은 기업들이 한정된 시장을 두고 생존을 건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시장을 말합니다. 다른 업계의 경쟁도 만만치 않지만 국내에선 농식품 업계가 대표적인 레드 오션으로 꼽힙니다. 수많은 생산자들이 경쟁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평범한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다른 경쟁자들과 브랜드와 품질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면 경쟁 요소는 가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기준이 얼마나 싼 가격으로 상품을 내놓느냐 한 가지뿐이니까요. 대부분의 농민과 중소 식품기업들이 항상 상품을 어디에 판매할 수 있을지, 판로를 두고 쩔쩔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농식품 시장 중에서도 쌀 시장이야말로 레드 오션 중의 레드 오션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요. 쌀 소비량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죠. 시장 자체가 작아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것에 견줘 쌀 생산량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수요는 줄어드는 데 공급은 그대로이니 가격은 점점 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로선 시장에서 거래되는 쌀값이 정부가 정한 일정 가격 이하로 떨어지면 정부가 그 차액만큼을 보전해주는 변동직불제를 통해 쌀 농가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수많은 생산자들이 상품을 쏟아내지만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국내 쌀 시장의 냉엄한 현실인데요. 그렇다면 이런 쌀 시장 안에서 블루 오션(Blue Ocean)을 개척하는 게 가능할까요? 블루 오션은 앞서 말한 레드 오션과는 정반대의 시장을 뜻합니다. 이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말합니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장인 만큼 제대로 된 블루 오션을 만들어낸 기업은 상당 기간 경쟁 없이 안정적으로 이익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이번 글에선 레드 오션으로 꼽히는 국내 쌀 시장에서 기능성 성형쌀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바탕으로 블루 오션 개척에 나선 농업회사의 사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전남 나주에 자리 잡은 농업회사법인 명성제분과 이 회사를 이끄는 김철진 대표와 차경숙 상무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회사는 쌀에 여러 식재료를 섞어서 만든 기능성 성형쌀과 쌀로 만든 파스타면, 쌀과자 등을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특히 기능성 성형쌀이 이 회사의 주력 상품군인데요. 쌀을 제분기로 빻아 쌀가루로 만든 뒤 여기에 역시 가루로 만든 톳, 울금, 다시마, 표고, 녹차 등을 섞고 이를 다시 쌀알 모양으로 굳혀낸 제품입니다. 단순히 기능성 쌀이라고 부르지 않고 기능성 ‘성형’쌀이라고 부르는 것도 성형이란 단어에 ‘일정한 형체를 만든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이 같은 기능성 성형쌀 사업을 벌이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이들 부부가 남편의 고향인 전남 영암군에 내려와 정착하게 된 사연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이들 부부가 영암군으로 내려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2000년입니다. 차 상무는 귀농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떠올립니다.
“원래는 의정부에서 둘이 고깃집을 했었는데 남편이 그때 몸이 많이 아팠어요. 제대로 가게를 운영하기 힘들 정도였죠. 그래서 가게를 그만두고 친정이 있는 포천 쪽으로 가서 야산을 빌린 다음에 거기서 흑염소를 키우는 일을 했어요. 목장 옆에 있는 한 칸짜리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살면서 그곳을 집 겸 식당으로 사용했죠. 손님들이 오면 닭볶음탕이나 염소 요리를 팔면서 어렵게 살았던 시절이에요.”
차 상무는 그렇게 아픈 남편을 돌보면서 어린 딸을 등에 업은 채로 목장 일과 식당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렇게 5년을 살았죠.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는 나날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딸까지 세 식구가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아가던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김 대표의 아버지, 그러니까 차 상무의 시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오리농장에 와서 왕겨(쌀 껍질) 거두는 일을 하면서 지내라’라는 전화였습니다. 오리는 기온 변화에 예민한 동물입니다. 오리 축사 안에 왕겨를 깔아주는 것도 축사 내부 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김 대표의 아버지가 김 대표 부부에게 내려와서 해보라고 한 일은 왕겨를 구해다가 자신의 오리농장과 다른 농장들에 납품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에 김 대표 부부는 흑염소 목장을 정리하고 영암군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김 대표와 차 상무 부부는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사업을 배워나갔습니다. 영암군이 김 대표의 고향이긴 하지만 십대 시절 고향을 떠난 후 계속해서 타지에서 생활해왔기에 변변한 인맥이 없는 건 다른 귀농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차 상무는 사업을 막 시작했던 시절의 어려움에 대해 “시골은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다 친척이고 동창이고 해서 우리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납품처를 뚫는 게 정말 쉽지 않았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혼자서 남편의 병간호를 하면서 딸아이를 키우고, 목장 일과 식당 일까지 해냈던 차 상무의 억척스러운 성실함과 타고난 붙임성 때문에 사업은 조금씩 규모를 키워나갔습니다. 다행히 이 시기에 남편 김 대표의 건강도 회복돼 그 역시 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왕겨 납품 사업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이들 부부는 쌀눈이라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견하게 됩니다. 벼에서 왕겨를 뽑아내고 나온 현미를 도정하면 쌀눈이 나오게 되는데요. 이 쌀눈에는 좋은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어 쌀눈을 가져다 자신들이 만드는 식품에 첨가하는 식품업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만큼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말이죠.
왕겨 납품 일을 하면서 쌀눈이 어떻게 거래되는지 유통 구조를 알게 된 이들 부부는 쌀눈 생산‧유통업에 뛰어듭니다. 가까운 영암, 해남, 보성 등에 있는 큰 정미소에 거래를 트고 원료를 받아다가 여기에서 쌀눈만을 뽑아내서 판매하는 방식이었죠. 이렇게 뽑아낸 쌀눈은 농협 하나로마트 등을 통해 판매했습니다. 왕겨 납품 사업에 이어 쌀눈 생산 사업까지 순조롭게 성장하면서 부부의 사업은 안정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김 대표와 차 상무 그리고 이들 부부가 이끄는 명성제분이 기능성 성형쌀이라는 블루 오션 개척에 나서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쌀눈 생산 사업으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이들 부부는 2016년 나주군에 있던 제분소인 명성제분을 인수합니다. 제분소를 인수하면 사업 규모를 확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존 왕겨 납품, 쌀눈 추출 사업과도 충분히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김 대표 부부는 제분소를 인수한 뒤 전남 지역의 여러 특산물과 쌀을 섞어낸 새로운 종류의 쌀을 만드는 도전에 나섭니다. 외부 업체의 주문을 받아 쌀을 가루로 빻아주는 제분소의 전통적인 사업 모델만으로는 앞으로 큰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제분소가 갖고 있는 기술력을 활용하면 남들은 개발하지 못 하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차 상무는 시댁에서 처음 맛본 ‘톳밥’에서 처음으로 개발할 상품 아이템을 떠올립니다. 톳밥은 말 그대로 해조류인 톳을 넣어 지은 밥을 말하는데요. 해산물이 풍부한 전남 지역 특유의 요리법입니다.
“결혼하고 시댁에 내려와서 톳밥을 처음 먹어봤는데 그때는 쌀에 톳을 넣어서 밥을 해먹는다는 게 신기했어요. 먹어보니까 맛이 괜찮았어요. 또 톳이 철분도 많고 몸에 좋은 식재료니까 톳밥을 먹으면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래서 저도 그 이후로 집에서 종종 톳밥을 해먹었는데 건강에 좋은 건 알겠지만 밥하는 게 번거롭더라고요. 잘못하면 톳에서 나오는 비린내가 나기도 하고 또 아무래도 밥이 거무스름하고 그러니까 그게 싫은 사람은 잘 안 먹더라고요.”
‘건강에 좋은 톳밥을 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상품이 나온다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사업가이자 주부이기도 했던 차 상무의 머릿속에는 이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차 상무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는데요.
사실 그 이전에도 시중에는 톳밥용 쌀이 판매되고 있긴 했습니다. 일반 쌀에다가 톳에서 뽑아낸 영양분과 향을 코팅해 입힌 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차 상무는 기존 코팅쌀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주부 입장에서 보면 영양분을 코팅한 쌀들은 쌀을 씻는 과정에서 영양분이 씻겨내려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어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주부들도 똑같이 생각하겠죠. '비싸게 주고 샀는데 막상 영양분은 다 씻겨내려가는 거 아니야?' 소비자들이 그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아예 쌀 자체에 톳의 영양분을 박아버리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죠. 제분소를 운영하게 되면서 쌀을 가루로 만든 다음에 다시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굳히는 기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이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각종 특산물을 가루로 만든 뒤 쌀가루와 섞어 다시 쌀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성형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선 재료를 혼합한 뒤 가루로 만들고(분쇄) 그 뒤에도 증숙, 반죽, 성형, 건조, 숙성 단계를 거쳐야 하죠. 아무리 기술을 갖고 있는 제분소였다고 해도 한, 두 번의 시도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쌀과 톳을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할지, 황금 비율을 알아내는 게 제일 힘들었죠. 톳을 2%도 넣어보고 10%도 넣어보고 2~10% 비율 안에서 계속해서 섞어봤어요. 톳 말고 다시마나 표고버섯을 넣을 때는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여러 비율들을 테스트해봐야 했죠. 처음 톳밥을 만들려고 실험하면서 사용한 쌀만 25톤 정도가 돼요. 그 많은 쌀들을 다 파묻어버렸어야 했으니 묻을 때마다 마음이 정말 아팠죠.”
7개월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2017년 4월 마침내 ‘톳쌀’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콩, 보리, 조와 같은 잡곡처럼 밥을 할 때 쌀과 함께 약 3 대 7의 비율로 섞어서 먹으면 되는 쌀입니다. ‘밥할 때 톳’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톳쌀 개발에 성공한 이후 녹차, 울금, 다시마, 표고 등의 다른 농산물을 활용한 기능성 성형쌀도 잇달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차 상무는 지역 특산물을 원재료로 한 기능성 쌀 개발이 성공하면서 지역 농가들과도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사업 구조가 됐다고 설명합니다. 전남 지역의 다양한 특산물의 판로가 더 넓어졌기 때문이죠.
“저희 회사에서 만드는 쌀에 들어가는 특산물들은 다 지역 농가들한테서 사 오는 것들이에요. 완도에서는 톳과 다시마를 가져오고, 표고는 장흥에서 주로 가져오고 있어요. 보성에서는 녹차를 갖고 오고 진도에서는 강황을 갖고 오죠. 쌀도 물론 다 지역 농민들한테서 사 오는 쌀이이고요. 저희 회사 사업이 잘 될수록 지역 농민들도 함께 잘 되는 구조에요. 사업을 중요한 게 내가 100을 벌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50은 나눠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때문에 농산물 판매량이 늘어났으니까 지역 농민들도 다들 저희 회사를 응원해주시고 이런저런 도움들을 주려고 하시고요.”
처음 기능성쌀을 내놓은 뒤에는 주로 영암과 나주 등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판매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판매처를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농협 하나로마트 등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서도 소비자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명성제분의 사례는 극심한 경쟁과 소비량 감소라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쌀 업계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고 기존에는 없던 상품을 내놓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농업계에서도 생각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 블루오션 창출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차 상무는 명성제분이 판매하는 기능성쌀을 쌀이 아닌 ‘쌀과 함께 섞어먹는 잡곡’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건강에 좋은 영양분을 갖추고 있고, 밥을 할 때 조금씩 섞어먹는다는 점에서 쌀보다는 잡곡에 더 가까운 상품이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제품의 겉모습이 아닌 제품이 소비자에게 주는 가치를 중심으로 자신의 제품을 정의 내리는 것이죠.
“남들이 만드는 것과 똑같은 제품을 내놔봐야 시장에서 이기는 건 힘들어요. 그렇게 되면 결국 가격 경쟁으로만 흐르게 되고 저희처럼 작은 업체들의 경영은 점점 더 힘들어지죠. 저희처럼 작은 회사들일수록 남들이 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고 거기에 맞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내놓고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농업 분야라고 해서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않는 건 아니니요.”
홍선표 한국경제신문기자
rickey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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