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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키 Sep 07. 2018

020. 노쇼(NO-SHOW) 씨


TO. 그분께.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 저희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죠?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만 확인해서 연세는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단지 여자분이란 거 밖에 모르겠네요. 목소리가 나이가 좀 있는 걸로 보아(?), 아줌마에서 할머니 사이라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할머니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저도 할 말은 있네요. 당신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겼으니깐요. 
이제부터 편의상, 노쇼(NO-SHOW) 씨라고 부를게요. 노쇼씨! 아마 제 목소리를 기억도 못 하실 거예요. 그리고 약속을 깼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실 테죠. 왜냐면 2017년 9월에 당신이 오기로 하셨으니, 거의 1년이 돼가는 일이거든요. 그 조그만 일 가지고 왜 지금까지 질척거리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날 만큼 강렬한 기억이었거든요.
다 까먹으셨을 것 같아서 상세하게 설명해드릴게요. 인력거를 이용하기로 한 시간이, 오후 4시였어요. 그리고 노쇼씨와 통화연결이 된 시간이 4시 20분. 제가 20분 동안 노쇼씨와 통화하려고 9번 전화를 걸었네요. 그마저도 4시 10분까진 한 통밖에 걸지 않았습니다. 노쇼씨가 오고 있는데 제가 괜히 보채는 것처럼 보일까 봐요. 4시 10분부터 20분까지 몰아서 8통을 걸었네요. 그리고 마지막 9번째에 노쇼씨가 전화를 받으셨고요.
“깜빡하고 예약 취소를 못했네요.” 
이렇게 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시는 모습에 저는 감명을 받았답니다.


노쇼에 대한 채팅방 현황


아, 예약 취소 안한 게 뭐 그리 대수냐고요?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죠. 인력거꾼은 보통 하루 전에 예약을 배정받습니다. 인력거꾼에게 시간을 고려해서 골고루 배정하죠. 그런데 당신이 오지 않아서 4시부터 5시까지 시간이 붕 떠버렸네요. 건당 돈을 받는 인력거꾼은 시간이 생명인데 말이죠. 5시 15분에 다음 예약이 있어서, 4시 20분부터 1시간 투어를 받기도 애매해졌었죠.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보통 예약이 잡히면 1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도착해 손님을 기다립니다. 그날은 혹시나 손님이 일찍 올까 싶어서 20분 전에 약속 장소에 나가있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40분이란 시간이 사라진 거죠.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3시 30분에 노부부 한 쌍이 저에게 인력거 비용이 어떻게 되냐고 묻더군요. 그리곤 흔쾌히 한 시간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노쇼씨와의 약속 때문에 그분들 이용을 거절했습니다. 3시 40분, 대만 여자 커플(아마 레즈비언)이 저한테 한 시간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또 거절할 수밖에 없었죠.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인력거 투어에 대해 문의했습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많았냐고요? 왜냐면 노쇼씨가 예약한 날이 9월 토요일이었거든요. 9월은 날도 선선하니 인력거 타기 딱 좋은 시기고, 토요일은 아시다시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놀러 오는 날이거든요. 그리고 2시부터 6시까지 사람들이 인력거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노쇼씨가 다른 사람들이 인력거를 탈 기회를 뺏은 셈입니다. 당신이 가볍게 여긴 기회가 누군가에겐 잃어버린 기회인 거죠. 
제 성격이 겁이 많아서 대놓고 욕하지 못한 게 좀 후회스럽긴 합니다. 여기서 쌍욕을 섞어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진 않겠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저도 당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될 테니까요.
대신에 다른 데에선 이런 짓을 반복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약을 누릴 자격이 되지 않는 분이라면 아예 예약을 하지 않으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예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노쇼씨는 모르는 것 같거든요. 매스컴을 타면서 유명해진 최현석 셰프가 왜 그렇게 노쇼를 비판했는지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서비스직에서 일해보니 노쇼가 얼마나 나쁜 건지도 알겠고요.
사실 전화 한 통이었으면 괜찮았을 텐데요. 예약 전날에 "사정이 생겨서 이용을 못하게 됐습니다." 이런 전화, 아니면 문자 한 통만 보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제발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만 생각해주십시오. 백 번 중에 한 번 있는 노쇼 고객님.


FROM. 인력거꾼 록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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