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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키 Nov 02. 2018

031. 연예인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손님: 말레이시아 남자 두 명


인력거에 올라탄 남자 둘은 몸집이 왜소했다. 둘 다 키가 작고 깡마른 몸매에 얼굴도 까무잡잡했는데 전형적인 말레이시아 남자였다. 횡재였다. 매번 육중한 몸집의 남자 손님들만 태우다가 오랜만에 가벼운 손님을 태우게 돼서 기분이 좋았다. 배낭과 짐을 몇 개 들고 타긴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인력거를 끌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람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력거 페달을 밟는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나는 성인 남자 둘도 거뜬히 끌고 다닐 정도로 강한 편이다. 그런데 이번엔 시작부터 이상하게 페달이 묵직했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는데도 인력거가 도통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코스는 끝없는 언덕이었다. 페달을 밟다 보니 금세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라서 나는 입고 있던 윗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빨리 부탁해요.", "빨리 앞에 있는 인력거를 가로질러 줘요."
말레이시아 남자들은, 내가 끄는 속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던지 자주 보챘다. 무거운 수레를 끄는 것도 벅찬데, 무리한 속도를 부탁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남자들이 들고 탄 무거운 짐이 뭐였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남자 한 명은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커다란 기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연예인이 탄 인력거를 찍었다. 이 둘은 촬영팀 감독과 카메라맨이었다.

내가 태웠던 카메라맨(맨 왼쪽)과 문제의 배낭. 배낭 외에도 커다란 짐 하나를 더 들고 다녔다. 사진은 왼쪽부터 카메라맨, 인력거꾼, 남녀 연예인.


이 날 촬영은 드라마 '도깨비'와 관련된 촬영이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드라마 도깨비를 좋아해서, 드라마 촬영지를 찍으러 촬영팀이 한국까지 온 것이었다. 북촌엔 도깨비 촬영지가 많아서 촬영팀이 이곳에 들리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촬영지 두 곳


이 날 촬영은 단순히 도깨비 촬영지를 찍는 게 아니라, 촬영지를 둘러보는 연예인을 찍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모든 카메라 앵글과 사람들의 관심이 말레이시아 연예인을 향했다. 인력거꾼과 시종일관 하이톤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 도깨비 촬영지를 둘러보는 모습을 모두가 숨죽여 지켜봤다. 

모든 관심이 연예인으로 쏠린 동안 불행히도 나는 그 상황을 볼 겨를조차 없었다. 무거운 짐 덩어리와 성인 남자 두 명을 실은 수레를 끄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카메라가 집중되는 현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기에 촬영팀 전체의 모습을 두루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촬영을 모니터링하면서 요구 사항을 쉴 새 없이 무선으로 전달하는 감독. 때론 인력거 위에서, 때론 인력거 아래에서 연예인을 담아내는 카메라 맨들. 인력거 수가 부족해서 뜀박질로 인력거를 쫓아오는 작가들. 많은 사람들이 촬영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노력이 그뿐일까? 인력거를 타며 도깨비 촬영지를 둘러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 인력거 회사와 사전 연락을 하는 사람, 스케줄과 촬영 날짜를 잡는 사람, 연예인들보다 몇 시간 일찍 나와 인력거꾼들과 코스를 논의하는 사람, 후에 영상을 다듬어 보기 좋게 편집할 사람 등등. 내가 미처 보지 못한 크고 작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연예인들이 돋보일 수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모습. 말레이시아 연예인 남녀(왼쪽)와 인력거꾼들(오른쪽 세 명)


심지어 이 사람들은 기념사진에도 찍히지 않았다. 작가와 감독, 카메라맨처럼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날 기념사진에도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기록물에도 남지 않는 얼굴들은 시간이 가며 서서히 잊혀질 것이었다. 아니, 보여진 적조차 없어서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던 카메라맨의 모습, 촬영 전반을 신경 쓰며 눈을 굴리던 감독, 자기 몸보다 무거운 짐을 나르던 사람들(필자를 포함한). 그 외에 나름대로 본인의 일을 해나가던 촬영팀 구성원 하나하나.

TV나 영화 스크린에 나오는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걸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빙산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본체가 숨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빙산 아랫부분이 사라지면 빙산의 일각도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크고 깊었다. 

그리고 사람의 중요도가 단순히 이름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도 느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조그맣게 나온다고 해서 노력이 부족하거나, 역할이 보잘것없다는 걸 뜻하지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몫을 살아내고 있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세상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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