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부터 잘못된 장애인식
재준이와 함께 생활하며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사용했던 말이나 행동이 장애와 연관된 '욕'같은 것은 아닌지 조심하게 되고, 재준이에게 읽어 줄 책이나 보여줄 미디어들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고 나니 좀 심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동화책이나 미디어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애다. 왜 영웅이나 선한 인물들은 완벽한 외형을 가지고 있고, 악당들은 외적인 기형이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피터팬>에 나오는 악당 후크선장은 팔 한쪽이 없는 지체장애인이다.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무려 ‘후크'다. 그가 가진 '장애'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닌가.
<라이온 킹>의 주인공 심바의 삼촌, 악당인 스카도 마찬가지다. 그의 한쪽 눈가에는 흉터가 있는데, 이름도 그의 외적인 기형을 가리키는 ‘스카(흉터)’다.
<미녀와 야수>의 야수도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름이 '야수'다. 이쯤 되면 아이들이 외형적 약점을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정도가 아닐까 싶어 진다.
또 장애는 '벌'로 묘사되는 일이 흔하다. 내 어린 시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서 주인공인 카렌은 할머니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그 벌로 빨간 구두를 신고 끝나지 않는 춤을 추게 된다. 카렌은 결국 춤을 멈추기 위해 다리를 자른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 발이 없는 지체장애인이 되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라푼젤>에서는 라푼젤과 왕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마녀는 왕자를 성에서 떨어트린다. 왕자가 떨어진 곳에는 가시덤불이 있었고, 이로 인해 왕자는 앞이 보이지 않게 된다. 즉 '시각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이 된 왕자는 라푼젤을 찾아 떠나게 되고, 왕자와 라푼젤이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자 왕자의 눈은 다시 보이게 된다. 사랑을 받으면 시각장애가 해소되다니. 나는 이 동화를 시각장애 아이가 읽지 않길 간절하게 바란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시작한다. 그런데 동화에서 장애를 다루는 방식을 생각해볼 때 아이들이 앞으로 장애를 어떻게 이해하게 될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또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동화책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피터팬을 보게 된다면, 다리가 없는 아이가 빨간 구두를 보게 된다면, 시각 장애가 있는 아이가 라푼젤을 본다면 대체 어떤 마음이겠냐는 것이다.
장애는 ‘악'도 ‘벌'도 ‘결핍'도 아니다. 듣고 보는 모든 것을 흡수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물에서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차별이 시작되고 있다면, 이는 분명한 문제이다. 장애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뿌리부터 잘못된 이러한 장애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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