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다섯 살의 봄, 재준이가 가장 좋아했던 활동은 민들레 꽃씨 불기였다.
재준이가 어린이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민들레 꽃씨를 찾으러 숲으로 들어갔다. 그게 우리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민들레 꽃씨를 찾으러 다니게 된 계기 자체는 사실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다. 많은 발달장애 아이들이 그렇듯, 재준이는 입으로 바람을 내뿜질 못했다. 입을 동그랗게 마는 것 까지는 되는데, 그 이후 ‘훅’하고 바람을 뿜는 것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그 다섯 살의 봄 어느 날, 재준이는 바닥에 피어있던 민들레 꽃씨를 보더니 쪼그려 앉아 ‘훅'하고 바람을 부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모습에 너무 놀라 옆에 있던 민들레 하나를 뜯어 재준이 입 앞에 갖다 댔다. 재준이는 또 ‘훅'하고 바람을 불어 꽃씨를 날렸다.
그 뒤로 우리는 하원 후 매일 민들레를 찾으러 다녔다. 바람을 뿜는 연습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오름을 오르고 숲에 들어가 꽃을 찾았다. 찾은 꽃을 꺾어 재준이에게 주며 “선물"이라고 했다. 재준이는 ‘훅'하고 바람을 뿜어 꽃씨를 날렸다. 우리는 날아가는 꽃씨를 보고 ‘와-'라고 소리치며 좋아했다.
숲으로 들어갔던 어느 날에는 주변 사람들을 따라 고사리를 꺾기도 했다. 한라산 중턱은 고사리가 많이 나는 장소다. 그래서 매년 봄마다 고사리를 따러 동네 아주머니들이 찾아온다. 처음에 우리는 고사리를 찾는 방법을 잘 몰라 눈에 보이는 고사리를 모두 땄다. 우리 모습을 보던 주변 어르신들이 ‘작은 건 질겨서 못 먹으니 갈색빛이 도는 큰 고사리를 따라’고 말씀해 주셨다. 한 눈에 초보를 알아보시다니. 진정한 고수들이시다. 어르신들은 큰 고사리를 발견하면
“여깄네, 이거 따”
라고 말씀하시며 연신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넓은 숲을 한걸음에 달려갔다. 재준이는 민들레 꽃씨를 꺾던 실력으로 큰 고사리를 뚝뚝 잘 땄다.
재준이는 숲에서 편안해보였다. 마구 달리고 소리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숲에서, 고사리를 따라고 우리를 부르던 어르신들은 깡충깡충 잘 뛰어다니는 재준이를 보며 빨리 온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그 때, 자연에서 자유롭게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숲을 만나기 전까지 재준이는 아파트 안에서 조심조심 걸어야했고, 소리를 질러도 안됐다. 본능대로 움직이고 소리치면 혼나는 것이 일상이었던 도시 생활에서 재준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한참을 뛰어다니며 숲에서 고사리를 따온 날에는 집에서 고사리를 삶았다. 어른들이 고사리는 삶아야 독성이 빠진다고 말씀해주셨다. 겁이 많은 나는 고사리를 끓이고, 찬 물에 열심히 헹구고, 다시 삶고, 헹구고를 반복했다. 초록빛이 나는 고사리도 삶으면 우리가 아는 갈색빛의 고사리가 되었다.
한라산 숲에 가면 언제든 고사리를 딸 수 있으니, 우리는 한 번에 먹을 양 만큼만 따서 집으로 갔다. 자연 안에 있으면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고사리를 무쳐서도 먹고, 들기름 고사리 파스타도 만들어 먹고, 고사리를 잘게 잘라 재준이 볶음밥에도 넣어 주었다. 직접 따서 먹는 고사리는 마트에서 말려서 파는 고사리 맛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맛있었다.
4년이 지난 어느 봄 날, 나는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꽃을 보고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 재준이는 이미 입으로 바람을 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왜 연습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연습을 시키려 했던 게 아니고, 재준이가 잘하는 것을 보고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숲에서 민들레 꽃씨를 주면 재준이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훅’하고 몇 번이나 바람을 불었다. 그때, 재준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좋아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계속 바람을 불진 않은 걸까?
당시 재준이가 자주 그렸던 그림이다. 그때는 재준이가 말을 하지 않아 무엇을 그린 것인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지개와 별'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 이 그림을 보고 재준이에게 무엇을 그린 거냐고 물었더니 재준이는 "선물"이라고 답했다. ‘선물' 은 남편과 내가 숲에서 재준이에게 민들레 꽃씨를 주며 했던 말이다. 재준이는 봄의 숲과 민들레꽃을 그린 것이다. 4년 전의 봄 날을 기억하며 ‘선물'이라고 말하는 재준이. 나는 그런 재준이의 마음을 생각하면 민들레 꽃씨가 날리는 것처럼 코끝이 간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