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없어도 괜찮아요. 이대로도 충분해요."
이천십칠년 유월 십사일 수요일
우리의 하루 일정을 세 단어로 요약하기에 '먹고', '자고', '싸고' 만큼 정확하고 노골적인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여행을 떠나서 생존 자체에 큰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먹을거리, 최소한의 누울 자리 그리고 최소한의 '소화 및 배설기관 작동'까지. 어쩌면 이것들은 한국에 있으면서 단 한순간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너무나 당연한 요소들이었다.
일상을 살면서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무너질 때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도 입안에 돋은 혓바늘 때문에 마음껏 먹지 못할 때나 오래간만에 편하게 자려고 누웠는데 옆집에서 들려오는 부부싸움 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룰 때, 그리고 수만 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변비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일상에서 이 세 가지만 제대로 작동? 한다면 스트레스받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안다. 그 세 가지가 충족되고 나면 열 배, 백 배, 천 배가 훨씬 넘는 스트레스가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한다는 것을(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스스로 또 다른 스트레스를 선택한다는 것). 끼니가 해결되면 그다음부터 우리는 '더 맛있는 끼니'를 찾아 고민하기 시작하고, 잠자리가 해결되면 우리는 '더 넓고 안락한 잠자리'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변비가 해결되면... 음.. 방심한 나머지 또 다른 변비를 야기시키려나? 아무튼, 우리는 '만족'하는 법을 잊은 건지 배운 적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만족,
꽤나 단순하지만 아무나 누리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
여행을 시작한 지 스무날이 갓 넘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그 기간 동안 우리를 괴롭힌 건 가벼워진 통장 잔고나 인도 삐끼들의 사기와 같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인도 탈리를 제대로 먹지 못했을 때, 제대로 된 숙소를 구하지 못해 길거리 노숙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을 때, 그리고 먹은 걸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을 때ㅠ 가장 힘들었다.
어제 낮잠을 자기 전, '너 지금 만족하니?'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럼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해 봤다. 지금 나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다. 왜냐하면, 지금 묵고 있는 숙소는 와이파이도 제대로 안 터지고 온수도 저녁에 아주 잠깐 나오는 데다가 다질링 시내 파업으로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 있고, 하루 세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고, 먹은 거 조금이나마 배설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돌아갈 나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바꾸려는 목표를 가지고 긴 여행을 떠나왔다. 그 수많은 목표 중 하나는 바로 '만족'이라는 길을 걷는 것. 두려워서, 가기 싫어서 감히 외면했던 그 길을 그야말로 제대로 걸어보는 것이 내 일상 속 중대한 목표가 되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어제의 내가 아닌, 내일의 나도 아닌 바로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라서가 아닐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지금 내가 뭘 먹을지, 지금 내가 어디서 잘지, 지금 내가 변을 시원하게 볼 수 있을지'에 집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내일 뭘 먹을지, 내년에 어디서 살지, 10년 뒤에 발생할 질병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지'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오진 않았던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살아가는 느낌을 200% 충만하게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여'기서 '행'복한 거다. 행복이 뭐 별건가. 낯선 곳에서 누울 자리를 잡고, 현지 느낌 충분하지만 끼니를 해결하기에 부족함 없는 식사를 하고, 자는 동안 그 음식을 소화하기에 부족함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여기에, 그것들을 허락해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런 여행이면, 그런 행복이면 참 좋겠다.
우리 커플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함께 읽은 책 중, 부부가 쓴 <없어도 괜찮아>라는 책이 있다. 솔직히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제목 자체가 워낙 강렬해서인지 여행을 떠나온 지금도 나에게 큰 도전을 주는 문구로 남아있다. 부디 아래 두 줄의 가상 대화가 우리 일상 속 일부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선식아, 지혜야. 너희들 정말 더 없어도 괜찮아?'
"네. 더 없어도 괜찮아요. 이대로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by S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