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한숨 돌리고 좀 더 천천히 걸어가자."

by 별꼴유랑단
고산병은 우리에게 '빨리 걷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천십칠년 칠월 십일 월요일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내가 상상했던 우리의 모습은 이러했다. 낯선 여행지 속 한적한 숙소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식사는 가볍게 과일 몇 조각으로 해결, 그 외에 남는 대부분의 시간은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 도시 간의 이동은 최소화하고 맘에 드는 동네를 만나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오랫동안 있다가 오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상상했던 유랑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너무도 달랐다. 여행의 시작을 인도와 네팔로 선택한 탓인지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꽤나 바쁘고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고 나면 최소 2박 3일은 쉬어야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는 탓에 대부분의 스케쥴은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하루하루 알차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욕심은 어찌나 많은지, 실제로 안나푸르나 7박 8일 트래킹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기준) 내일 판공초 1박 2일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피곤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전 글에서 썼다시피 우리 별꼴유랑단의 여행은 '오늘 뭐 할까'에 집중하는 여행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도와 네팔 여행의 특성상, 꼭 보고 싶은 것을 보거나 가고 싶은 곳을 가기 위해서는 최소 2~3일 전에 예약 후 이동해야 하는 게 기본이고, 특히 유명 여행지로 떠나는 투어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 동행자들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일이 꽤 많은 편이다. 그래서 충분한 휴식보다는 다음 일정에 맞추어 스케쥴을 조정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자연스럽게 '내일 뭐 할까'를 신경 쓰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레 지역에 도착한 뒤 약간의 고산병 증세 때문에 한참을 누워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왜 이렇게 바쁘고 피곤하지?'

이러려고 여행 시작한 거 아닌데 라는 자괴감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맨 처음 상상했던 여행의 모습과 거리가 생긴 것 같아 약간 속상했던 것 같다. 옆에 누워서 나와 함께 낮잠 자고 있는 J179를 보니 살짝 안쓰럽기도 해서 더욱 그렇다.

사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주 작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욕심' 하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별거 아닌 아주 작은 것이지만 쉽게 포기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바로 그것.

대부분의 해외여행이 그렇듯이,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고 나면 일단 '본전 생각'이 난다. 가성비를 최대로 뽑아내야만 한다는 생각, 내가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고 듣고 즐겨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게 그것이다.

'왜 떠나왔는가'라는 질문 앞에 다시 서 본다. 수많은 세계여행자 사이에서 나는 어떤 목적과 사연을 가지고 이 낯선 땅에 와있는지, 다시 돌아갈 곳에서 이 여행은 어떤 의미를 지닐지 생각해 본다.

야심 찬 계획과 포부로 블로그도 만들었고 각종 SNS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동안 올린 글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충분히 더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더뎌진 건 아마도 여행이 점점 바쁘고 힘들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ㅁㅁ부부 혹은 ㅇㅇ커플로 불리는 수많은 세계여행 커플의 글을 보고 있으면 그분들의 성실함과 정성에 엄지손가락을 세우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예쁘고 깔끔하게, 게다가 정성까지 곁들여서 멋진 콘텐츠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내심 부럽기도 하다. 우리 또한 그에 못지않은 멋진 콘텐츠들을 만들자 다짐하고 떠나왔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갈 길은 대단한 ㅁㅁ부부들의 길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한숨 돌리고 좀 더 천천히 걸어가자고 다짐해 본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충분히 잘 해왔지만, 빠르게 달리는 속도에 못 이긴 나머지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못 보고 지나치지는 말자고, 본전이나 가성비 같은 자본주의스러운 단어가 아닌 우리 내면의 소리에 좀 더 집중해 보자고 다짐해 본다. 그러다 보면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뜰 수 있을 거고, 남들 다 해보는 여행이 아니어도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by S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