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의 NG'라는 주제를 받고 빈종이에 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주제를 몇 번인가 반복해서 쓰다가, 머릿속에 스치는 것들을 쓰다가 멈췄다. 마구잡이로 채운 종이를 다시 읽어보니 연결성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그리고 다시 반복해서 적어보는 '봄, 여름의 NG’. 내게는 쉽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주제임이 분명했다. 왜 쓰기 어려울까? 봄? 여름? 수차례 겪어온 계절 속의 에피소드들을 떠오르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 건 바로 'NG'라는 글자였다. 주로 각본이나 대본이 영화나 드라마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많이 쓰는 단어로 계획된 무언가가 어긋났을때 사용한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치밀하게 계획하고 현실에 옮기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쪽대본을 쓰고 후다닥 촬영을 하는 쪽에 속했다. 미리 준비를 못하는 습관 그런 점도 있지만, 대부분은 긴 대본을 쓸 수 없는 내 안의 작가 때문이었다. 4회차를 찍다보면 5회차에 대한 아이디어나 생각이 떠오르고 또 쓰고 있던 대본을 수정해야하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그러다보니 남들은 긴호흡으로 미리 결정하는 일을 그때 그때 수정하며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발버둥쳤다. 심지어 몇가지 예상 상황을 써두고 촬영하면서 방향을 바꿔버린적도 많았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2회차를 쓰는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야기가 5회차에 벌어지기도 한다. 막장 드라마의 쪽대본 같이 벌어지는 내 삶의 이야기에서는 NG라는 말로 붙일 부분을 찾기 힘들다. 결말은 물론이거니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어렴풋한 방향성만을 지닌 작가는 기죽지 않고 열심히 쪽대본을 쓰고 있으니까.
(한참을 쓰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봄, 여름의 실수'가 주제였다면 전혀 다른 글을 썼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