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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an 25. 2023

김밥 지옥

김밥 마는 백수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그 말은 잘못된 말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김밥 지옥은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

"그럼 내일부터 내가 싸줄게."라는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한마디에서.


엄마와 따로 살게 된 후 '아침밥'이란 단어는 내 인생에서 희미해졌다. 사회생활 초반에 다녔던 회사는 대부분 밥값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직접 도시락을 싸야만 했다. 잠들기 전에 점심 도시락을 만들기도 바빴던 내게 아침밥은 사치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아침을 챙겨 먹는 남자와 결혼했다. 잠들기 전에 남편은 다음날 먹을 아침거리를 사거나 만들었다. 토스트, 치아바타로 만든 샌드위치, 주먹밥, 또띠아에 불고기와 갖은 야채를 올려 만든 롤, 월남쌈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메뉴를 보고 감탄했다. 도시락 싸기에 이골이 났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아침을 위해 쏟아내는 그 정성이. 물론 덕분에 가끔 얻어먹고, 더러 주변에 부럽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얻어먹는 것에 그쳤고, 내가 남편의 아침밥을 챙기는 일은 없었다. 먹고 싶은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법이니까. 그 법칙은 내가 백수가 되었을 때도 이견 없이 지켜져 왔다.


얼마 전 살던 동네에서 조금 먼 곳으로 이사를 왔다. 새로운 공간에 살아볼 기회가 있다는 건, 설레기도 하지만 꽤 피곤한 일이었다. 손에 익은 물건을 많이도 떠나보내고 공간에 다시 맞게 들였다. 집이 얼추 정리될 때쯤에는 단골 가게들이 그리워졌다. 작지만 매대가 알차게 차 있던 빵집, 삼겹살이 생각날 때면 5분 안에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고깃집, 문 여는 날이 들쑥날쑥하지만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맥줏집까지. 새로운 곳을 찾는 것보다 익숙한 것이 더 그리운 것을 보니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건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왠지 섭섭해져서 좋게 생각하자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김밥은 또 어디서 사야 하나…."


남편의 단골 가게 리스트에는 24시 김밥집이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아침밥 직접 만들기를 포기한 남편이 선택한 대안은 김밥이었다. 출근길에 간단하게 먹기 좋고, 각종 야채가 들어있어 밸런스까지 좋은 음식이라 칭송했었다.


"밑에 편의점 있던데, 편의점 김밥 사면 되겠네."


"편의점 김밥 맛없어. 별로야."


만들기 귀찮아서 사 먹는다면서… 입맛도 까다롭다. 휴대전화을 들고 주변 김밥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군데가 나오는데 문을 여는 시간이 남편의 출근 시간보다 늦었다. 빨리 여는 곳은 좀 멀고, 주차하기가 마땅치 않아 보였다. 김밥, 김밥. 이렇게 사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나? 흔하디흔하게 본 것이 김밥천국인 것 같은데, 남편의 출근길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김밥이 어렵던가? 김 위에 밥 올리고 계란, 단무지, 맛살. 야채가 있는 거 대충 넣으면 되고.'


"여보, 김밥 만들기 어려워?"


"어렵다기보다 귀찮지."


"안 그럴거 같은데? 그럼 내가 내일부터 싸줄게."


그 순간 뭐에 씌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김밥 한 줄을 말아본 적 없는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새벽 배송으로 김밥용 단무지 2.8킬로와 맛살 1킬로를 샀을 리가 없지 않은가…. 믿을 수가 없다.


호기롭게 시금치도 무치고 당근과 햄을 볶았다. 계란은 두툼하게 부쳐 썰고, 밥을 식히고 간을 했다. 어쩐 일인지 냉동실에 김이 넘쳐났고, 서랍에는 김밥말이가 있었다. 김 위에 밥, 계란, 맛살, 햄, 단무지, 시금치, 당근까지 올려두고 말았다. 부드럽게 쓱 말렸다. 생각보다 싱겁게 내 손으로 만든 김밥이 탄생했다. 김밥용 김이 아니라 그런 건지 아니면 밥이 너무 뜨거울 때 말아서 그런 건지 김이 좀 눅눅했다. 썰다가 옆구리가 터지기도 했다. 그래도 먹을만 했다. 옆에서 맛있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 남편. 암만봐도 목적이 뚜렷한 리액션 같다. 그래, 이 또한 얼마나 가겠는가. 아침마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작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백수는 그렇게 김밥 마는 백수로 승급했다.


누군가가 소풍 가는 날이면, 집에 김밥이 넘쳐났다. (누군가라고 해 봤자 나와 동생 둘뿐이지만) 온 가족이 아침으로 김밥을 먹고, 소풍에 가서 점심으로 김밥을 먹었다. 심할 땐 김밥이 저녁 식탁까지 점령했다. 그저 손이 큰 엄마가 만들어서 그렇겠거니 짐작했던 일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김밥은 한 줄만 만드는 게 훨씬 어려웠다. 재료를 아무리 줄인다해도 서너 가지는 들어가야 하는데, 다듬고 볶고 써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최소 서너 줄을 만들 수 있는 양이 발생한다. 그러니 재료를 조금씩 더 추가하고, 그날 하루를 김밥의 날로 정하는 건 지극히 효율적인 일이었다. 그에 반해 식구가 딸랑 둘인 집에서, 매일 저녁 단 한 줄의 김밥을 만드는 나는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깨달았을 땐 이미 김밥 지옥 한가운데였다. 냉동실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김, 아무리 말아도 줄어들지 않는 2.8킬로의 단무지 그리고 두 달째 질리지도 않고 맛있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갇히고 말았다.


약속이 있던 저녁, 밖에서 꼬마김밥을 사 왔다. 신경 써서 불고기 김밥을 골라 샀는데 '노 맛'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왜 하필 골라도 맛없는 김밥집이 걸리고 만 건지, 덕분에 내가 만든 김밥이 맛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기쁘지 않다. 내 상태를 눈치챈 남편이 몇 번 알아서 먹겠다고 말해왔다. 옳다구나 받아들이려 했는데, 알아서 김.밥.을 사먹을거라고 했다. 냉장고 가득 재료를 두고 김밥을 사 먹는다니… 결국 눈앞에 보이는 퇴로를 두고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언젠가 자연스레 탈출하게 될 순간을 기다리며, 기나긴 연휴가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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