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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an 25. 2023

닭발

할머니 생각

나이가 들수록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한다. 교육이 어렵다면 조기 '경험'이라도 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별것 아닌 경험을 한번 해봤냐, 못 해봤냐로 시도하는 자세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먹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시기가 지나면, 손을 뻗어 입에 넣는 순간까지 다른 잡다한 것들이 많이 따라붙는다.

-식감이 이상할 것 같은데?


-색은 또 왜 저래?


-윽, 이상한 상상해버렸어!


와 같은 생각이 주저하게 만든다. '닭발'도 그런 장벽이 높은 음식 중 하나이지 않을까? 요즘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쯤에 술집을 드나들면서 '닭발'이라는 말에 소름 돋아 하던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것 같다. 내게는 떠올리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메뉴였는데, 그 괴리감이 신선했다.


언제 처음 닭발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 덕에 먹을 수 있었다는 건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오랜 기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스무 평도 안 되는 작은 집에서 북적이게 살기도 했고, 뛰어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한동네에 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많이 먹었을 텐데 그 밥상 위에 무엇이 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가 조금 큰 이후로는 그 밥상을 피해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은 맛이 없었다. 라면을 끓여 주실 때는 언제나 면발이 다 불도록 익혀서 주셨고, 반찬통에 담긴 김치는 너무 익어서 시고 텁텁한 맛이 났다. 그래서 엄마의 퇴근이 늦는 날에 엄마가 집에 왔다는 거짓 전화를 하고, 직접 계란밥을 해 먹곤 했다. 맛없다 할 수도, 그렇다고 먹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거짓말을 택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만든 음식 중 눈이 번뜩일 정도로 맛있었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닭발이었다. 닭발 볶음? 양념 닭발?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그저 우리 가족은 '닭발'이라고 부르면, 할머니가 만든 그 요리를 떠올렸다. 먹는 날이면 밥상을 커다란 신문지로 덮었다. 앞접시와 예의상 젓가락을 올려두면 준비는 끝이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집에서 가장 큰 냄비가 밥상 가운데 얹혔다. 짙은 회색의 쇠 냄비에는 빨간 양념의 닭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미지로 떠올리다 보니 좀 무서울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건 단연코 맛 때문이었다. 젓가락은 있지만 자연스레 손으로 잡았다. 촉촉하고 빨간 양념이 가득 밴 쫄깃한 살의 닭발은 표현할 수 없이 맛있었다. 먹을 땐 맵지 않았는데, 다 먹고 잠시 쉬고 있으면 입술 주변부터 얼얼함이 올랐다.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입바람으로 입술을 식혀내곤 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손에 묻은 양념도 쪽쪽 빨았다. 얼추 배가 부를 쯤이면 밥 한 공기를 떠 와서 양념을 넣고 비벼 먹었다. 빨간 양념이 여기저기 튀고 자잘한 뼈가 한가득 쌓인 신문지, 글로 쓰자니 자꾸만 풍경이 이상하게 묘사되는 것 같아 아쉽다. 커다란 냄비 한가득 있던 닭발은 하룻저녁을 넘기기 힘들었다. 돌아서면 먹고 또 먹기 바빴으니까.


지금은 닭발을 잘 먹지 않는다. 그 단어에 조건 반사처럼 군침이 돌지만, 더는 도전하지 않는다. 실패한 경험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중에 파는 닭발은 지나치게 매웠다. 한 입 삼키고 나면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의 맵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맵지 않아 비린 맛을 느낀 적도 있고, 또 크기가 너무 커서 식감이 안 좋았다. 뼈 없는 닭발은 닭발을 먹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양념은 밥을 비빌 수 있을 정도로 자작하고 묽게, 맵지만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만 맵게 그리고 뻣뻣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알맞은 크기의 닭발…. 내가 먹고 싶은 닭발을 찾을 수 없었다. 곁에서 음식하는 모습이라도 봐뒀다면 흉내라도 내볼 텐데, 기억 속 장면은 언제나 신문지 깔린 밥상 위에 얹힌 커다란 냄비부터 시작했다. 그 닭발을 먹지 못한지 무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가끔 상상만 해볼 뿐이다.


시장에 다녀온 엄마는 꼭 한 번씩 닭발을 사 오곤 했다. 둘이 앉아 말없이 닭발을 먹다 보면 그 닭발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먹는 건 좀 뻣뻣하다, 그치? 할머니는 진짜 어떻게 만든 거지?'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럼에도 장을 보다 닭발을 사 오고 마는 엄마의 마음을 왠지 알 것만 같다. 문득 스치는 그리움에 누군가와 그 감정을 나누고 싶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이다. 왜냐면 그 닭발 이야기는 언제나 할머니 이야기로 흘렀으니까. 자그마한 키에 하얗게 세어 회색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잔머리 하나 없이 은빛 비녀로 단정하게 묶었다. 넙데데한 얼굴에 낮은 콧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내 콧등을 꼬집듯이 주무르며 오똑해지라는 주문을 외웠다. 틈나면 혼자서도 자꾸 그렇게 하라며 이른 것은 내 콧대가 할머니와 똑 닮았다는 증거였다. 잔주름이 손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많았는데, 웃는 얼굴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푸근한 마음이 들게 했다.


할머니와 함께한 조기 경험은 닭발뿐만이 아니었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이야기는 몇 번이고 다시 해달라고 조를 정도로 신비로웠다. 더부룩한 배를 문지르는 손의 따뜻함을 경험했고, 밥을 먹고 곧잘 체하곤 했던 할머니 배를 두 손모아 꾹꾹 누르며 시원해지길 바랐다. 우리는 서로의 약손이었다. 그리고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 할머니 집에서 간밤의 꿈을 나누며 함께 웃었고, 맛없는 아침 밥을 먹었던 평범한 날이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눈 뜨지 못할 걸 알았더라면, 온기 없는 손을 잡는 그 순간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되뇌어 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다 그러셨어."


얼마 전 할머니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할머니가 죽거든 나비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 왠지 그 말에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평생 제대로 된 터전에 오래도록 살아본 적 없을 할머니가 땅에 뿌리 박힌 나무가 아니라 나비고 되고 싶다고 했던 게 가슴 아팠다. 나는 어쩌면 푸근함을 더해준다 생각했던 주름의 의미도, 약손이라며 내 작은 손에 기대어 참아냈을 고통도 전혀 알지 못했나 보다. 따뜻함 뒤에 감춰둔 삶의 무게가 상상할 수도 없이 무거웠다는 걸, 할머니를 보내고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짐작만 해본 것이다.


철없는 손녀는 고작 닭발에 할머니를 떠올린다. 차려준 밥이 맛있었다고 거짓말하면 될 텐데, 굳이 맛없었다며 솔직하게 글을 쓴다. 이상한 말이라는 걸 알지만, 맛없는 밥상 덕분에 닭발이 그토록 빛났던 게 아닐까? (이런 말까지 쓰면 할머니 진짜 서운하려나..? 그런 뜻 아닌 거 알지?) 자꾸 떠올리다 보니 그 국물이 자작한 닭발이 몹시도 그립다.


평생 다시 먹지 못해도 좋으니, 부디 나비가 되어 훨훨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살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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