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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May 30. 2023

이름을 부르면,

이름에 담긴 힘

새로운 게임을 하려다 닉네임을 정하지 못해 화면을 꺼버린 적이 있다. 게임뿐만이 아니었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처음으로 이메일을 만들던 순간에도 재촉하는 화면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아예 가입을 미뤘던 경우도 많았다. 작가명을 정할 때도 얼마나 많이 고민했던지…. 누군가가 의미를 물어올 때면 고민한 시간에 비해 별다른 의미가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나 아쉽다. 참신하면서도 어렵지 않고, 부르기 쉬우면서 '나'라는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이름. 분명 적잖은 이름을 만들어 썼는데, 마음에 닿는 것을 찾지 못했다. 아니면 딱 떨어지는 멋진 이름이 어딘가에 있을 거란 로망이 너무 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감탄하게 만들고 싶다기보다 정말 내 마음에 드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이 요상한 욕망은 이름에 관심이 많았던 한 친구에게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수는 유난히 이름을 잘 외웠다. 만난 적이 없더라도 그랬다. 내가 했던 이야기에 나온 직장 상사, 그녀가 모르는 친구, 친구의 딸, 조카 이름까지 대부분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다. 이름을 지칭하지 않고 말을 하다가 '아- OO이 말하는 거지?'라고 되물을 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참 공들여 이름을 외우는 나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다. 곁에 있다 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수는 이름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의 이름뿐만 아니라 동물의 이름, 간판에 적힌 상호까지 유심히 바라봤다. 웃긴 이름이라면 몇 년을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며 웃었다. 나도 그에 물들어 재미있는 간판을 보면 사진을 찍어 공유하곤 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벌레에 일부러 귀여운 별명을 붙이기도 했고, 작은 인형에도 이름을 꼭 붙여 불렀다.


그러다 함께 이름을 지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가상의 인물이 만들어졌다. 성별, 성격, 말투를 한 번에 정할 때도 있었고, 문장 하나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이름을 맞춰나가는 것, 그게 전부인 놀이였다. 빈 종이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글자를 조합하며 써 내려갔다. 고작 두세 글자일 뿐이었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만 바꾸어도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같은 이름일지라도 어떤 성(姓)을 붙이는지에 따라 인물이 바뀌기도 했다. 이름을 짓다 보면 필수적으로 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바로 입으로 소리 내 불러보는 것이다. 손으로 쓰면서 부르고 또 수의 목소리로 듣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을 주고받듯이 하다 보면, 어느새 문장 하나밖에 없었던 인물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반항아 기질이 다분하고, 어른들에게 버릇없게 구는 OOO(이름을 기억하지만, 같은 이름인 분이 기분이 나쁠까 봐 적지 않겠다)는 어쩐지 껌을 씹을 때도 소리를 크게 낸다.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해진 어른이 이름을 불러본다.
OO아, OO아- 하고.


그렇게 딱 맞는 이름을 찾아냈을 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만나서 가끔은 그 이름을 떠올리며 웃음 지을 만큼.


소설을 쓰는 요즘, 대부분 쓰고 싶은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면에는 언제나 인물이 있다. 처음에는 뭉툭한 형체만 존재하는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성격, 성별, 얼굴, 키, 체형, 말투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점차 또렷해진다. 단순했던 장면도 인물과 함께 불어난다. 그를 키보드에 마구 옮겨대려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름이었다. 도무지 OO이라던가, 아무개라던가 적어두면 진도가 나가기 어려웠다. 가만히 빈 종이에 이름을 끄적이다 보면 친구와 하던 놀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비슷해 보이지만 놀이라고 하기엔 망설여진다. 새로운 인물을 만들 때면 이름 붙이느라 애를 먹기 때문이다. 막연히 정하려 하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눈앞에 보이는 글자로 마구잡이로 만들면 촌스러웠다.


고민을 하던 내가  발견한 대안은 사이트를 참고하는 것이다. 자주 보는 사이트에는 2008년도부터 2023년도까지 태어난 아이들이 많이 쓴 이름이 적혀있다. 한 해에 남녀로 구분되어 있고 각각 100개씩, 200개가 적혀있다. 위에서부터 주르륵 눈으로 훑어본다. 인물에게 맞을 몇 가지를 골라둔다. 성(姓)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여러 종류의 성씨가 적힌 사이트를 열어 골라둔 이름 앞에 얹는다. 그리고 소리 내 읽는다. 성까지 붙여 읽고, 이름만 읽어보고, 누구야 하고 친구처럼 불러본다. 고민 끝에 이름을 정해도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세 번 바꾸기도 했다. 다른 장면일 땐 몰랐는데, 두 인물을 나란히 쓰면 글자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쓰는 나조차 헷갈려서 한 인물의 이름을 다시 정했다. 한창 쓰고 있던 이름을 문득 녹색 창에 검색해 봤다. 입에 잘 달라붙던 그 이름은 범죄자 이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바꾸기로 했다. 즐거움? 괴롭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몇 주 전 새로 등장하는 인물에 안태호와 안태오라는 이름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혼자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 남편에게 물었다. 간단하게 성격, 외모 등을 설명하고 어떤 이름이 더 어울리는가 하고. 그랬더니 맥 빠지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 차이 모르겠는데? 사람들 별로 신경 안 쓸걸?"


'그런가? 바보 같은 일로 고민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역시 내게는 중요한 일이다. '호'냐, '오'냐…. 종이에 안태호, 안태오를 적어두고 입으로 여러 번 불렀다. 뭉개지듯 발음하면 비슷하게 들리는 이름에 분명 다른 느낌이 있다. '태호'에는 안정적이고 조금은 묵직한 인물이 떠오른다. 그에 반해 '태오'는 젊고 활기찬 모습이 어울렸다. 글자 자체로는 안태호라는 이름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안태오는 조금은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느낌이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몇 번을 끄적이며 적다 안태오로 결정했다. 나란히 선 인물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태오야, 오랜만이다."

남자치고는 작은 체구의 태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달갑지 않은 인물과 마주 선 태오는 얼굴을 구기지 않으려 애쓴다. 그를 바라볼 때면 언제나 잊고 있던 감정이 떠오른다.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패배감'이.


이렇게 새로운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막막하고 답답함이 자주 덮쳐오는 요즘, 부쩍 인물을 이름을 소리 내 부른다. 끙끙거리는 작가로 부르다, 소설 속 인물로 부르다, 툭 하고 떠오르는 무언가를 따라간다. 부름에 반응하고 표정 짓는 인물, 그렇게 따라가다 어느새 나는 그가 되어본다. 마치 안개가 자욱한 곳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자꾸만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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