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넓은 우주 속 우리는
올해의 변화를 한 가지 말하자면, 직장에서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회사에는 분기별로 'OO랩'이라는 학습 모임을 지원한다. 이 회사를 다닌 2년 반 동안 동료들 하는 거 구경만 하다가, 가슴속 음흉하게 품어왔던 나의 야망... <sf북클럽>을 만들게 된 것이다. 뭔가 지하조직 같은 느낌이 나서 좋다... 뭔가 범접하기 힘든 느낌? 암튼 그런 것이 있다.
지난주, 본격적이었던 두 번째 모임을 가졌다. 너무 즐거웠던 기억을 남겨보고자 기억이 있을 때 급하게 씀…
최대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소개글을 작성했다. (내 기준) 대한민국 SF문학 쌉메이저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마이너였어?! 충격... 아무도 신청 안 함... 직원 수가 800명이 넘는다면서요. 그러다 지금은 다른 팀이 된 (동생)매니저를 강제로 가입시켜 버렸다. 그러고 나니 한 분이 가입 신청을 하셨고, 내가 랩장이기 때문에 승인을 해주는 시스템인데 진짜 누구든 오시면 바로 레드카펫 깔아드리고 무릎으로 걸어서 마중 나간다고요. 암튼, 그렇게 어둠의 SF북클럽은 3명으로 대항해를 시작한다. (사실 소항해임ㅎ)
첫날은 역시 여고 바이브로 분식을 한 바가지 시켜서 먹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이 클럽을 운영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 클럽 개설자로서 본분을 잊으면 안 되지. 모임 후기까지 정성스레 작성해야 회사에서 다과비 혹은 도서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한국 Sf문학을 본격적으로 읽어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첫 책을 선정했다. 그것이 바로 김보영 작가의 <얼마나 닮았는가>이다. 책을 고를 때 정말 많이 고민했다. 정말... 라이트 하게 가면 <지구에서 한아뿐>이 좋을 거 같은데,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은 <재와 물거품> 혹은 <좀비즈 어웨이>인데... 좀비는 사람을 찢어... 암튼 뭐 이런 고민을 며칠 간 하다가 호불호 없이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은 <얼마나 닮았는가>를 선택했다.
암튼 그렇게 첫 모임을 마치고, 한 분이 더 가입 신청을 하셨다. 바로바로론 승인~ 기다리고있었읍니다확실하게모시겠읍니다 수준. 이로써 밥 시키기 딱 좋은 4명이 된 것이다. 나는 어떤 모임이든 밥 먹으러 가서 한 테이블에 다 앉을 수 있는 인원을 선호한다. 그렇게 우리는 4명이서 느슨한 한 달 주기의 북클럽을 시작한다.
<얼마나 닮았는가>의 첫 단편은 '엄마는 초능력이 있어'인데 무친... 도서관에서 읽다가 눈물이 흘렀다.. 미치셨나요... 이 이야기는 친엄마가 아닌, 아빠의 젊은 애인과 아빠의 딸이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에 대해 썼는데... 그걸 엄마가 가진 초능력으로 표현한다. 근데 그 문장이 아주 멋져부러서 안 울 수가 없다. 북클럽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과 출신 쌉T께서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뭐 왜... 저는 문과 F입니다...
이 중단편집에는 초인 이야기도 있는데, 초인들이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서 '구원'해주는 이야기다. 사실 이게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런 사회에서 초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일반인들을 구원해줘야만 하고, 구원해 주면 또 다른 것을 바라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인을 '비정상'으로 구분 짓고 그들을 배척하면서 결속을 다지는 세력들에 대해서도 다룬다. 비록 초능력을 가진 초인이 내 곁에는 없지만, 분명 우리 인생에는 초인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는 그들에게 대단하다 말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게 되는 트라우마, 혹은 잃어버린 생계 등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타인에겐 이미 지난 일이고, 의인에겐 진행 중인 일이라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누굴 도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표제작 <얼마나 닮았는가>는 정말 걸작이다. 갓보영 갓보영!!!!!! 진짜 최고다. 흥분하지 않고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은 희대의 명작이다... 인간의 의체에 AI가 이식되어 우주선에서의 생활을 그린다. 이 AI는 인간처럼 되고 싶어 하고, 선원들은 인간 행세를 하는 AI에게 반감을 갖는다. 우주선 안에서 선장과 선원들이 심하게 대치하는데, AI는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알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거 때문이다. 나중에 반전 요소처럼 이 '알지 못하는 것'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정말... 이렇게 뻔한 거였는데도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그만큼 작가가 설계를 잘해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암튼 해물짬뽕 같은 감상을 느끼게 된다. 갓보영 갓보영!!!!
SF를 읽어봤든 읽어보지 않았든 무조건 무조건 읽으시라. 채시라. 읽지 않으면 손해인 소설이다.
마지막 단편 <같은 무게>는 사회에서 '장애'로 구분되는 오빠의 이야기다. 남들은 사회화가 되지 않았다고, 이상한 규칙들을 답답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자기만의 안온한 일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에 대해서 '경계선 지능 장애‘, ’아스퍼거 증후군' 등을 쉽게 판단하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요즘 꼭 읽어봐야 하는 소설이 아닌지... 하고 생각했다.
암튼, 완독한지 좀 돼서 생각나는대로 써봤는데, 저는 김보영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네요... SF는 너무 재밌읍니다. SF 붐은 옵니다 온다고요. (이미 왔다면 죄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