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History 13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입니다.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넓게는 문학, 음악의 영역까지 포함됩니다. 금주는 다다의 전개과정과 예술적 성취에 대해 답습하고 그러한 역사의 중심에 있던 예술가 <쿠르트 슈비터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의미함에 의미를 둔 것을 암시하는 다다이즘은 ‘다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아무 뜻도 없는 ‘다다’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난 온 예술가들 사이에서 생겨났습니다. 다다라는 이름이 지어진 데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첫째로,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말을 우연히 다 다다이스들이 사전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어린이를 닮고 싶은 깊은 욕망과 인간의 충동이 잠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다다운동의 창시자인 시인 <휴고 발>은 그들의 본거지였던 어느 카바레의 한 여가수에게 붙여 줄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도 불어 사전에서 발견한 것이 ‘다다’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다다이즘 운동의 주요 무대는 바로 스위스 취리히였습니다. 주변 국가(프랑스, 독일)에 비해 취리히는 반체제 예술가에 대한 박해가 적었던 곳이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다다이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취리히를 시작으로 뉴욕, 바르셀로나, 베를린, 콜로뉴, 파리까지 다다예술은 퍼져 나가게 됩니다.
다다는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넓게는 문학, 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다다이즘은 미술 양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다 예술가들은 작품 창작 이외에도 비상식적인 연설문, 퍼포먼스, 추상 작업등을 통해 도전적인 실험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러한 실험의 저변에는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추미성(아름답지 않은 것에서 미를 찾는 것), 비합리성, 반도덕적인 것을 찬미하고 반체제적인 형태를 띠었습니다.
이러한 다다 운동의 성격은 엘리트적이고 보수적인 문화가 1차 대전이라는 비극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강한 비판의식에 의해서 도출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다이스트들은 기성세대의 모든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의 원초적 욕구에 충실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것과 대립적인 개념들을 비판하였으며 불합리하고 장난스러운 것, 대립적이고 허무한 것,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선호했습니다.
다다이즘은 정확히 1916년 루마니아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와 독일의 작가 휴고 발(Hugo Ball)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다다이스트들이 있지만 이들 중 다수가 문학가나 시인이었던 점을 미루어 보아 초창기 다다이즘 운동의 전개는 문예 운동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창기 다다이즘 운동에 있어 주축이 되었던 트리스탄 차라와 휴고 발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모더니즘 예술을 강력하게 부인했던 휴고 발은 볼테르 카바레에서 다다이스트들과 모여 우스꽝스러운 시 낭독회를 열었습니다.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과 근엄한 목소리로 시 낭독회를 하던 당시 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며 휴고 발은 두꺼운 종이로 몸을 감싼 채, 음성 시를 낭송했습니다.
음성 시란 “아라챠다샤프타텨토어아프파” 같이 뜻 모를 말들을 읊는 시의 한 형태입니다.
음성 시의 ‘음성’이란 말 그대로 구절들의 은유 관계에 의해 파생되던 의미체계로서의 시와는 반대로, 다다이스트가 육성으로 내는 기괴한 소리와 전혀 의미의 연관성이 없는 구절들의 충돌이 주는 새로운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음성 시의 느낌은 육체적인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휴고 발은 음성 시 낭독을 끝낸 후 온몸에 감싼 두꺼운 종이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자, 다다이스트들이 강단에서 휴고 발을 들어서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또 다른 초창기 멤버인 트리스탄 차라는 루마니아 출생으로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는 스위스에 있으면서 시와 문학의 새로운 운동인 다다이즘을 이끌었습니다. 차라는 현대 시인이 지녀야 할 자질을 갖추고 있어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현대 시인들 및 작가들과 접촉이 많았습니다.
트리스탄 차라는 서정시(시인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노래한 시의 한 종류이며 낭만주의적이다.)에다 특유의 신랄함을 집어넣는데 명수였습니다.
아래는 트리스탄 차라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영화 같은 일정 속의 추상적인 마음들>
별이 빛나는 따뜻함이 무한히 제공된다
녹색 램프가 전화를 받고 있다
조심스럽게 발열된 계절의 바람이
강의 마법을 휩쓸었다
나는 신경 속의 한낱 구멍이었어
맑고 얼어붙은 호수를 힘으로 꺾었습니다
하지만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원형의 테이블에 내려앉은
공포에 떨고 있는 냉정한 새 한 마리
-트리스탄 차라-
그의 시는 꾀꼬리가 노래하면서 내뱉는 욕설과도 같았다고 평가됩니다.
이후 문학분야에서 트리스탄 차라는 자의적인 관계에 있는 구절들을 연결하며 시를 극단까지 밀고 나갑니다.
1917년 잡지 <다다>가 트리스탄 차라에 의해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 시, 음향 시가 계속해서 발표되는 등, 이 당시 취리히에서 전개된 다다이즘 운동은 1920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다다이즘의 발생 배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카바레가 있습니다. (카바레란 공연장, 댄스홀 사교 모임장을 뜻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카바레와는 어감이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서 휴고 발이 음성 시를 낭독했던 <카바레 볼테르>입니다.
카바레 볼테르는 스위스 취리히에 자리합니다. 카바레 볼테르는 다다이스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1916년 2월 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카바레 볼테르의 설립자는 음성 시를 낭독한 휴고 발 본인입니다.
이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많은 예술가들이 정치적인 중립국 스위스로 모여듭니다.
전쟁을 피해 온 예술가들이 카바레 볼테르에 집중된 이유는 무정부주의적 예술 운동인 다다이즘의 실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여든 예술가들은 기계처럼 잘 짜 맞추어진 이성에 반대하고 우연성을 강조하는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칸딘스키, 파울 클레, 막슨 에른스트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예술가들도 이곳에서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다다 하우스’로도 불리는 카바레 볼테르는 2000년 들어 건물 노후화로 철거 위기를 맞았지만 스위스 취리히 시 당국의 협조로 예전의 모습을 훌륭히 복원해 재개방되었습니다.
스위스의 사례를 보면 국가가 문화를 관리하는 태도에 있어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요한 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던 상징적인 장소들이 리-모델링이라는 이름 하에 말끔한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지켜보아 왔습니다.
‘예술적 의미들은 대부분 형식에 침전되어 있다’라는 형식 미학의 주요한 테제가 있습니다. 장소와 작품들만 유지한 채 역사적인 맥락을 거부하고 말끔한 외관을 갖추게 되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적 유산들이 과연 제대로 된 예술적 아우라를 품고 있을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볼테르 카바레는 처음 지어졌던 원형 그대로 복원되어 현재도 무용 및 미술 전시, 퍼포먼스, 시 낭송회 등이 활발히 열리고 있습니다. 2009년 2월 한국 현대미술가 20여 명의 작품전이 개최돼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다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고,
다다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다다는 다다이다.
위의 글은 다다의 허무주의적, 부정적 자세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다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데에는 앞서 말했듯이 몇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는 하나, 결국 모두 우연이 관여했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 출처에 대한 논의와는 별도로, 이 명칭이 도덕, 예술 등
온갖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백지화하는 것을 기본 사명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없을 것입니다.
다다의 운동 기간은 실제로 매우 짧았으므로(1916~1922년) 폭풍처럼 휘몰아간 반동으로서 많이 간주되지만, 그 당시의 지식인중에 크던 작던 이 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훗날 프랑스에서 등장한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정신적 시조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다다이스트들은 내용과 형식의 절대적인 자유와 자발성을 얻기 위하여 생각과 표현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단절하기를 요구했고 신랄한 풍자와 해학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각국의 시를 동시에 낭독하기도 하고, 이른바 <소음 음악>이라는 소음으로만 된(예컨대 요란하게 종을 친다든지 하여) 독특한 음악을 연주하거나 공동변소를 이용하여 입체파와 미래파의 그림을 전시하는 등 기발한 착상으로써 그들의 울분과 분노의 돌파구를 찾곤 했습니다.
1916년 트리스탄 싸라에 의하여 창간된 잡지 <다다>와, 1924년 파리에서 간행된 트리스탄 싸라의 유명한 <일곱 개의 다다 선언>은 다다이즘의 부정적 정신과 파괴적 태도를 여실히 잘 표명하고 있습니다.
1916년에서 20년에 걸쳐 쓰인 이 다다선언은 모두 7부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특히 다다이즘의 본질을 예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예리하게 구명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잡지 다다에 실린 짧은 시들입니다.
<다다는 통일에 반대하고, 찬성하고, 또 미래에 뚜렷이 반대한다.>
<자유 곧「다다, 다다, 다다」, 노한 색채의 외침, 대립과 온갖 모순, 그로데스크, 자가당착 따위의 결합, 그것이 인생이다.>
<다다이스트는 시를 지을 때 한 장의 신문지와 가위를 가져온다. 자기가 지으려고 하는 시와 맞먹는 길이의 기사를 골라 그것을 오려낸다. 그 기사를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의 단어를 주의하여 오려내어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는다. 그것을 조용히 흔든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꺼내어 주머니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그것을 꼼꼼히 적는다.>
마지막 인용문은 다다이즘의 성격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그 밖에도 앞서 소개한 휴고 발 같은 사람은 ‘말 없는 시’ 내지는 ‘음향 시’를 지어 낭독했습니다.
이러한 다다 시의 실험은, 언어 기능을 해체함으로써 도리어 인간 목소리의 근원적인 요소를 되찾고, 우연한 언어들의 결합에서 기묘한 해학과 풍자적 요소를 발견했으며, 또 시어 대신 일상용어를 구사함으로써 직접적인 현실성을 되찾았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다이즘의 예술적 전개와 미적 성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러한 다다이즘 예술의 중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던 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사진 속의 <쿠르트 슈비터스>라는 인물입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일상 속에서 구하기 용이한 신문과 광고지 조각 등의 콜라주를 시작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콜라주를 이용해 전위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1920년 네덜란드의 다다이즘운동에, 1932년에는 파리의 아브스 트락 시옹 크레아시옹[Gruppe Abstraction-Création ] (1931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추상주의 미술가 단체로 1936년까지 동명의 잡지를 발간함, 우리가 잘 아는 몬드리안과 칸딘스키 등도 이 단체에서 활동했다.)에 참가하였으나 1940년 독일 나치당의 탄압을 피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품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저항이나 허무감이 근저에 항상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는 콜라주 그림, 거대한 잡동사니 건조물, 의미 불명의 소리로 불리는 음향 시등을 잇달아 만들어 냅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경우 다른 다다이스트들과는 달리 파괴적 행위보다, 일상에서 버려지는 폐품을 이용하는 등 상식이나 가치관의 전환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1919년 하노바에서 다다이즘 운동을 일으키고, <메르츠(Merz)>라는 잡지를 수년간 개인 편집했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 중에 모든 것은 끔찍한 아수라장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쓸모가 없었고, 쓸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모든 것은 무너져 버렸고 새로운 것들이 그 파편들 속에서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메르츠(Merz)>다. 그것은 내 안에 일어난, 당연히 그래야만 했던 혁명과도 같았다.’
위의 글은 <메르츠>의 창간자이자 디자이너인 쿠르트 슈비터스의 말입니다.
<메르츠>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독일 하노버에서 24회에 걸쳐 발행되었던 잡지입니다.
잡지 <메르츠>는 20세기 초반 동시대의 <바우하우스(Bauhaus)>, <캄포 그라피 코(Campo Crafico)>등과 함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으로서의 잡지를 새롭게 표방했습니다.
1920~1930년대 유럽에서는 미래주의, 큐비즘, 러시아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등 혁신적인 예술 운동들이 퍼져 나가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엘 리시츠키, 라슬로 모호이너지 등을 중심으로 잡지는 새로운 예술 운동의 한 형태로서 실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잡지의 내용을 넘어서 형식에 대한 실험들을 감행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잡지들은 모더니즘의 기운을 업고 더 정교하고,
체계적인 편집과 지면 레이아웃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다이즘으로 시작해 얀 치홀트로 대변되는 신 타이포그래피로의 역사적 이행 과정을 엿볼 수 있었던 잡지였습니다. 다다이즘의 특성에 따라 초기에는 다소 직관적이고 혼란스러운 디자인을 선보였던 쿠르트 슈비터스는 점차 신 타이포그래피 스타일로 잡지를 디자인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1924년 11호 그리고 슈비터스와 엘 리시츠키가 함께 만든 8/9호에서 볼 수 있으며, 이 잡지들에선 산세리프체, 굵은 괘선, 강한 대비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메르츠>는 한스 아르프(Hans Arp), 얀 치홀트(Jan Tschihold) 등 쿠르트 슈비터스의 주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이기도 했으나 쿠르트 슈비터스 개인의 포트폴리오이자 발언의 장으로서의 역할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잡지 <메르츠>는 한 비평가가 평했듯이 쿠르트 슈비터스 ‘혼자만의 운동(one-man movement)’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잡지 내에서 주변에서 발견하고 모은 오브제들을 콜라주로 만들면서 당시 사회에 대한 풍자적 발언을 했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가 위의 작품에 난잡하게 붙인 것들은 길거리에서 모은 금속 부품이나 나무, 밧줄 같은 것들입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자신의 작품으로 기계 문명에 대한 예찬과 같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제거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동떨어져서 명상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쿠르트 슈비터스는 살았던 것입니다.
실제 슈비터스가 회화를 정치적으로 진전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많은 비평가들이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슈비터스는 오브제를 통해 끝없이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가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작업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감정적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정치성을 띠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태도를 비추어 본다면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과 정치성은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쿠르트 슈비터스는 근대적 콜라주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콜라주란 현대회화 기법의 하나로 본래는 풀칠을 뜻하는 것이지만, 1912년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화면 위에 여러 가지 대상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큐비즘에서는, 아직 종이 따위를 붙이는 정도로 2차원의 회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뒤이은 다다이즘의 쿠르트 슈비터스와 만 레이 등이 일상의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서, 입체적인 작품으로 실현하기에 이르러 콜라주의 개념이 확대되고 이것이 2차 세계대전 뒤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로 이어집니다. (아상블라주란 폐품이나 일용품을 비롯하여 여러 물체를 한데 모아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기법입니다.)
위의 작품은 <마리아 네포무세노>라는 브라질 출신, 작가의 작품으로 화려한 색채의 빨대와 구슬로 만든 조각입니다. 아상블라주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콜라주는 20세기 미술 기법상 최대의 발명 가운데 하나이며, 미술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디자인 등의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물체를 도입함으로써, 종래의 미술작품 개념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은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적 콜라주의 출발시점은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업물같이 반예술적인 행위로써, 사진이나 인쇄물의 그림 등을 이용해 조합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콜라주는 1912∼13년경 브라크와 피카소 등의 입체파들은 유화의 한 부분에 신문지나 벽지, 악보 등 인쇄물을 풀로 붙였는데 이것을 ‘파피에 콜레’라 부르게 된 것으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이 수법은 화면의 구도, 채색 효과, 입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다다이즘시대에는 파피에 콜레를 확대하여 실밥, 머리칼, 깡통 등 캔버스와는 전혀 이질적인 재료나 잡지의 삽화, 기사를 오려 붙여 보는 이로 하여금 이미지의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하여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선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 쿠르트 슈비터스가 있었습니다.
다다운동과 초현실주의에 모두 속해있던 쿠르트 슈비터스는 전통적인 재료나 기법 그리고 관념적이거나 사회적 발상에서 유래하는 표현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콜라주라는 새롭고도 독창적인 형식을 개발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버려진 우표, 버스표, 손톱, 머리카락, 오래된 도록 등을 회화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는 선별되지 않은 재료를 작업에 사용하여 사물과 세상의 새로운 관계를 재창조했습니다. 그런 슈비터스를 두고 영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허버트 리드(Read, Hebert)는 ‘콜라주의 일인자’라 치켜세우기까지 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리고 붙이는데 주목한 쿠르트 슈비터스에게는 “재료 채집을 위해 땅만 보며 걷는 사람”, “주머니에 온갖 잡동사니와 풀, 가위를 넣고 다니는 신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크기나 무게에 개의치 않고 수집한 물건들이 넘쳐나는 그의 아틀리에는 ‘하노버의 쓰레기장’이란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보물창고이자 작품의 산실인 이 ‘쓰레기장’은 그 뒤 쿠르트 슈비터스의 살아있는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업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형 콜라주 구성입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은 주로 형태와 색, 텍스처, 그 밖의 실물들을 병치시킨 것들(나무 위에 철선을 얹거나 종이나 캔버스 위에 금속을 부착하거나 인쇄된 물질 위에 천을 입히는 식)이며 다채로운 디자인과 구성으로 추상적 오브제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독일 군국주의가 횡행하던 무렵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미술관에서 모두 철거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무렵 히틀러로 대변되는 독일 군국주의는 르네상스식 고전주의에 입각해 다분히 보수적인 미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다이스트들의 작업은 그들 눈에는 반체제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3차원의 건축적 구조물, 채취한 잡동사니를 변형시켜 만든 공간 구성입니다.
‘메르츠 바우(Merz bau)’로 더 잘 알려진 이 작품들은 대부분 나치의 폭정을 피해 제작한 것들로 첫 작품은 하노버에서 만들어졌으나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은 노르웨이에서 제작되었으나 1951년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으며, 세 번째 작품은 뉴욕 소재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의 재정지원을 받아 영국 앰블 레 사이드에 만들어졌으나 임종 전까지 완성되지 못한 채 영원한 미완성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자신의 작품 중 평면적인 것은 ‘메르츠 빌트(전자)’, 입체작품은 ‘메르츠 바우(후자)’라고 칭했습니다.
메르츠 바우(Merz bau)는 설치미술의 원조로 불리며, <환경예술>의 하나로도 봅니다.
환경예술(Environmental Art) 이란 보는 사람을 둘러싸며, 빛 ·소리 ·색채를 포함한 모든 소재로 이루어져 공간 전체를 채우는 예술형식입니다.
현대의 새로운 작품은 전시를 하는 형태에서도 새로운 수법이 요구됩니다.
환경예술은 보는 사람의 주위를 작품으로 둘러싸고 소리, 빛 등 감각적인 것들로 꾸며내는 독특한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슈비터스 작품인 ‘메르츠 바우’나 초현실주의의 대규모 전시회도 환경예술에 속합니다.
이러한 환경예술은 결과적으로 3차원적인 형태와 거대한 규모, 그리고 건축과 풍경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켜주었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는 이처럼 콜라주와 환경예술이라는 현대 예술의 커다란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자기가 처해 있는 삶에 끝없이 부정을 가하며 새로운 것을 끝없이 갈망했던 쿠르트 슈비터스의 예술혼을 ‘다다이즘 계열의 한 사람의 예술가’라고 일단락 짓기에 미안한 마음이 글 쓰는 내내 들었습니다.
그가 행했던 미적 성취를 다르게 기억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고민과 함께 금주 포스팅을 마칩니다.
– 라이트브레인 가치 디자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