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History 14
근대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조르주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1900년에 파리로 간 것도 그러한 간판 그림의 기법을 향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집안 내력은 조르주 브라크의 근간이 되어 입체주의 표현 형식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06년 브라크는 야수파적인 풍경화를 가지고 파리로 입성하며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07년, 마침내 파블로 피카소와 공동작업을 합니다.
그 후로 6년 동안 브라크와 피카소는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작업을 합니다. 둘은 2차원에서 3차원의 오브제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구도를 파기하는 시도를 감행합니다.
브라크는 그리 뛰어난 데생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직관적인 그림솜씨는 뛰어난 화가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조르주 브라크는 단색조 계열의 색채를 통해 정물을 평면적으로 해제하는 작업을 즐겨했습니다.
1912년 브라크는 피카소와 함께 현대 콜라주의 원형인 <파피에 콜레>를 창조합니다.
파피에 콜레 기법이란 추상적인 선의 요소 때문에 완전히 해체되어 추상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큐비즘의 미학적 방향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회화의 화면에서 사라져 버린 현실감과 일상성을 복원시키기 위해 신문지, 상표, 털, 모래, 철사 등의 구하기 용이한 오브제들을 붙여 새로운 조형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훗날 파피에 콜레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의해 현대적 콜라주로 발전되며 20세기 회화에서 비(非) 미술 재료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인식 형성에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파피에 콜레를 창안한 뒤부터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사물로 공간을 표현한다는 것에 매료되어 여러 가지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큐비즘의 수법을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브라크는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당했고 오랜 요양생활 끝에 1917년 제대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화가 <세잔>이 즐겨 머물렀던 남프랑스의 에스 타크에 머물며 그가 선호했던 소재들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색조 계열의 색채를 사용해, 정물들을 평면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평면을 이용한 구성들은 오히려 점점 더 복잡성을 띠고 추상화에 이르게 됩니다.
1908년 독일의 화상이자 미술평론가인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의 전시에서 선보인 조르주 브라크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포함한 27개 작품들은 드디어 ‘입체주의적’ 작품이라는 평을 얻게 되면서 큐비즘의 대표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입체파 즉, 큐비즘(Cubism)이란 용어는 1908년 화가 <앙리 마티스>가 브라크가 참가한 전시회에서 그의 풍경화를 보면서 ‘입방체(Cubes)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평론가 “루이스 보셀”이 잡지에 투고하는 과정 중 인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11년에 브라크에 의해 제작된 작품 <포르투갈 사람> 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숫자나 문자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문자와 숫자는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직업을 생계로 삼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후대 비평가들로부터 회자되고 있습니다.
큐비즘은 정확히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혁신운동으로 <입체주의>라고도 합니다.
큐비즘적 미학은 회화부터 시작되어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특징은 무엇보다 사물 본연의 형태(form) 존중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고전적인 색채 주의에 대한 반발로도 보입니다.
큐비즘은 르네상스 시대에 생겨난 이후 꾸준히 사용되어 오던 원근법을 그림에서 배제하며,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관찰해 다양한 시점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적 추상을 창조해냅니다.
그래서 입체주의 그림은 마치 대상을 조각낸 다음 다시 모아 재구성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자연을 재구성해 표현했던 폴 세잔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후 입체주의 양식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연을 원기둥이나 원뿔, 둥근 공 등의 형태로 나타낸 폴 세잔은 큐비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입체파(큐비즘)라는 말이 처음부터 지금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디 입체파(큐비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 대부분이 일반 대중에게는 인정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 사용된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입체란 앞서 말했듯이 미술 비평가인 “루이스 보셀”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입니다.
루이스 보셀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 차례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이 선보인 새로운 화면 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미술적 기교를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있어 큐비즘이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인 표현 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
(조르주 브라크)
우리가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파블로 피카소)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 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류가 이때 처음으로 시작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작품들을 보면 유사한 측면이 많지만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넘쳐나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문제입니다. 아래 두 그림 중에 어떤 것이 브라크의 그림일까요?
답은 왼쪽입니다.
오른쪽은 피카소가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의 건물들을 소재로 사용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그림을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큐비즘을 이해하는 훌륭한 방법이 됩니다. 이후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됩니다.
주제도 집이나 나무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과실, 술병, 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로 변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기타, 만돌린, 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오브제들의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섞여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인 확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의 물체는 일상적인 눈으로는 사물 본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들을 기점으로 작품을 보는 관찰자의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 <물체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1912년에 이르러서 입체파는 <분석적 입체파>를 지나 <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종합적 입체파는 분석적 입체파가 오롯이 화면 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현실성을 망각하기 시작한 시점에 등장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의 시초가 됩니다.
즉 물질적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뱃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입니다.
물론 큐비즘(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이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부여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파피에 콜레의 이질적인 촉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자극을 통과해 사람의 심리에 분명히 어떠한 물질적인 작용을 한 것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작용은 분명 피카소가 말한 ‘큐비즘은 화가가 자신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 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 지각이 그리 아름답고 찬미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브라크와 피카소가 살던 당시가 전쟁 시기였다는 것이 잘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훗날, 다다이즘은 현대적 콜라주를, 초현실주의는 포토몽타주를 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파의 현대적 발상 중의 하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입체파의 역할은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멸해가나, 그 후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큽니다.
큐비즘 운동은 사물을 단면적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획득해나가는 인류의 진화론적 단계로 서술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 라이트브레인 가치디자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