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가 고상만이 만난 군사망사고 유족 -1
제가 고정순님을 처음 뵌 때는 1998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 인권위>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을 때 '아들이 군에서 죽었다'며 찾아오신 이 어머니는 유난히 체구가 작았습니다. 키가 150cm나 될까 말까 했던 이 어머니가 금쪽 같이 귀한 아들을 잃게 된 사연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8년 6월 23일, 어머니의 아들이 군에 입대한 날이라고 합니다. 이날 어머니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남들은 입대하는 아들을 붙잡고 울었으나 어머니는 오히려 행복해서 연신 웃음만 났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결혼할 때 "저렇게 작고 왜소한 여자가 아이나 낳겠냐?"던 마을 사람들의 쑥덕거림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이 180cm가 넘는 훤칠한 미남으로 자라 군대를 갔으니 스스로가 대견해 입대하던 날은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들이 군입대하고 채 반년이 안 된 그해 12월 1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밤 9시 뉴스가 끝나가던 시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내 자식, 왜 죽었는지 모르는데 장례부터 치루라는 군
"여기 부댄데요, 거기 이ㅇㅇ 일병 집이죠?"
그리고 들려온 비보,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입대 전날 친구들이 몰려와 비좁은 방에서 함께 자고 훈련소까지 동행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던 그 아들이, 연탄 장사를 하며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어려서부터 늦은 밤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리다 애교를 부리던 그 아들이 '총으로 자살했다는 비보'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순간적인 전신 마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먼저 부대로 출발해야 했고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어머니가 아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고 합니다.
군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1시.
하지만 아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발가 벗겨진 채 누워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 미치지 않을 어머니가 누가 있을까요?
이 어머니는 더 그랬습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아들 밑으로 두 살 터울의 딸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먹고 살기 바빴던 그때, 딸이 '소아암'임을 뒤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결국 어린 딸을 잃은 후 유일하게 남은 아들마저 모두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때 어머니의 심정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들이 죽은 그날이 일병 진급 예정일이었어요.
일병 진급하면 휴가 나온다며 좋아했는데 그런 날 왜 자살을 하겠어요?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어머니의 의문에 부대는 납득할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장례를 빨리 치르라"며 닦달만 하더라는 겁니다.
데려갈 때는 '조국의 자식'이라더니, 죽고 나자 '못난 네 자식'이라는 식의 표리부동한 군 부대 태도를 보며 어머니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고 합니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장례 치룰 수 없다고 했어요. 내 아이가 죽었는데 부대 사람 누구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는 겁니다. 그게 너무 분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들 시신을 붙잡고 다짐했어요. 엄마 혼자라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그날부터 어머니는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의 어머니가 머리까지 삭발한 채 국방부 앞에서 '내 아들을 살려내라'는 피켓을 들고 울부짖었습니다. 죽을 각오로 관까지 가져다 놓고 무기한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싸워 찾아낸 진실은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아들은 군 복무 기간 내내 일상적인 구타와 가혹 행위를 당했습니다. 암기를 못 한다며 고참들로부터 밤새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상태로 머리를 걷어 차이기도 했습니다. 금품 갈취는 물론이고 밤마다 성적 괴롭힘을 당한 사실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진실의 일부가 드러나 가해자까지 구속되었으나 군은 사망 원인이 자해라며 순직 처리는 거부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망 이유가 무엇이든 '자해 사망은 순직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15년. 마침내 지난 2013년 3월 29일, 어머니의 한 맺힌 투쟁 끝에 군이 굴복합니다. 만 15년 만에 대전 현충원으로 아들이 순직 안장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이 어머니의 삶은 한마디로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5번의 승소와 패소, 대법원 파기 환송까지 거치며 아들의 순직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머니의 이날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기뻤을까요? 슬펐을까요... 돌아온 답은 의외였습니다.
"미안했어요. 제 아들이 저같이 못난 부모를 만나 죽은 것 같아 미안하고 불쌍했어요. 그리고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인 줄 알고 아들을 군대에 보냈는데 결국 미련한 엄마 때문에 제 아들이 죽은 것 같아 괴로웠지요."
어머니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전 군대 가서 내 아들이 죽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당연히 살아서 다시 돌아오는 줄 알았거든요. 이럴 줄 알았다면 누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겠어요? 아들이 만약 또 있었다면 저는 차라리 감옥에 보내지, 이 나라 군대에는 보내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징병제를 폐지하라', 어머니의 분노
그런 어머니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고 합니다.
군에서 자식 잃은 부모에게 왜 이 나라와 국방부가 그리 모질게 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 낳고 키워 가르쳐서 군대에 보냈는데, 그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면 국가와 국방부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텐데 왜 이리 괄시하는 것인지 너무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이럴거면 차라리 '징병 제도'를 폐지하라고 어머니는 말합니다.
"당신 자식이 못나서 자살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못난 자식, 내 품 안에서 잘 보듬어 살 테니 강제로 끌고 가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머니의 분노에 할 말이 없어진 저는 "그래도 이제 아드님을 현충원에 안장했으니 마음은 좀 놓이시죠?"라고 말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이어진 어머니 말씀이 또 가슴을 칩니다.
"아니오. 그럴 줄 알았는데....... 저는 이제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을 때는 그 한과 억울함을 풀고자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어 싸웠어요. 그런데 이제는 희망이 없네요. 전 이제 자식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 밥은 먹어 뭐하고, 물을 마시면 뭐하나 싶어요. 자식이 없는 부모가 무슨 인생입니까?"
어머니가 아들을 결국 화장하던 날, 또 한번 무너진 사연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결국 아들을 화장을 하러 가게 된 1998년 그때, 정신없이 울고 불며 따라간 화장터 앞에서 어머니는 어딘가 낯익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십 수년 전, 소아암으로 잃은 딸을 화장했던 바로 그 곳의 똑같은 화로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것에서 주저 앉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내 아들 딸이 모두 한줌의 재가 되었다"며 어머니는울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죽음에 더욱 한이 맺혔다는 것입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저는 어머니의 앙상한 손을 잡아 드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로부터 어느 날 연락이 왔습니다.
밥 한끼 함께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그간 도움을 준 저에게 식사 대접을 하라고 돈을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평소 제가 다니던 망원 시장통 유명한 3,500원짜리 수제비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음만 받고 밥은 제가 사겠다"고 했습니다. "민원인과 밥을 먹는 일은 제 원칙에 어긋나는데 다만 저와 밥을 드실 수 있는 방법은 밥을 제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 이 밥은 제가 살게요. 대신 비싼 밥은 어렵고 맛있고 저렴한 밥집이니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안된다며, 남편에게 돈도 받아서 왔는데 혼난다며 고집을 부려 결국 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산한다며 어머니가 손 지갑을 꺼냈는데 열려진 지갑 안에 언 듯 보이는 물건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목에 차고 다니는 '군번 인식표' 이었습니다.
아들이 남긴 군번 인식표, 그 사연
뜻밖의 군번 인식표를 본 저는 "아드님 것이냐?"고 여쭸습니다.
그렇게 해서 듣게된 어머니의 사연은 또 이랬습니다.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이 샤워부터 하고 싶다며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벗어 놓은 옷 위에 '어머니는 평소 본 적이 없던' 이것을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들에게 "이게 뭐냐?"며 묻자 그때 듣게 된 답변, 어머니는 아들의 그 말을 내내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 어머니. 그건 제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물건이에요. 잃어버리면 큰일 나요."
그랬습니다. 아들이 죽고 난 후 '아들 유품'이라며 부대측으로부터 어머니가 받은 몇 가지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이 군번 인식표였다고 합니다. 순간 어머니는 아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고 합니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물건'.
그날부터 엄마는 군번 인식표를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데모하러 가서도, 단식을 하러 가서도. 항의하러 갈때도 늘 함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꼭 현충원에 안장하겠다고, 그때 이 군번 인식표도 함께 묻어 주리라 어머니는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었습니다. 아들의 안장식 날.
하지만 어머니는 숙원이었던 그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들을 현충원에 안장하던 날, 어머니는 북받쳐오는 슬픔에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장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서 주머니 안에 뭔가가 손에 잡혀 꺼내보니 군번 인식표가 나오는 것 아닌가요. 아들과 함께 묻어준다고 15년이나 결심하고 다녔는데 그만 슬픔에 그 순간을 잊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나온 아들의 군번인식표를 부여잡고 어머니는 또 그렇게 오열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게 여쭸습니다.
그럼 이제 이것을 어떻게 하실꺼냐고. 어머니는 "내가 죽을때 군번 인식표와 함께 묻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 세상에서 아들을 만나면 "네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했던 그걸 이 엄마가 잘 지키다 가져왔단다"라고 말하며 아들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엄마의 마음을 과연 이 나라 군대에서 높은 분들은 아실까요? 이 엄마들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나요?
이런 엄마들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엄마와 똑같은 사연을 가진 38,009명의 군인 죽음이 여전히 밝혀지지 못한 채 구천을 헤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실 밝혀 명예를 회복시킬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의 재 출범을 차기 정부에 요구합니다.
저는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