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묘역이 있는 효창원은 국립묘지?? 독립운동가에게 제대로 된 예우를!
많은 분들에게 흔히 ‘발렌타인 데이’로 알려진 2월 14일.
흔히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렛을 주는 날로 알고 있는 이 날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로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력한 설 하나만 언급한다면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는 원정을 떠나는 병사의 결혼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원정에 나설 병사들이 결혼을 하면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터에서 몸을 사리게 된다는 것.
하지만 사랑에 빠진 병사들을 가엽게 여긴 발렌타인이라는 신부가 몰래 이들 병사의 결혼을 허락하고 주례까지 섰다가 발각이 되고 맙니다.
결국 발렌타인 신부는 이 일이 황제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여겨져 사형장에서 집행을 당하는데 그날이 바로 2월 14일이라고 합니다. 이후 사랑하는 청춘 남녀를 위해 목숨을 잃은 발렌타인 신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 발렌타인 데이 유래라는 설입니다.
일제의 상술속에 가려진 '영웅의 사형 선고일'
그런데 이러한 발렌타인 데이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인식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는데, 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일본 고베의 한 제과업체인 <모로조프 제과>에서 일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을 상대로 연인끼리 초코릿을 주는 마케팅 이벤트를 하면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 이벤트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1950년대에 또 다른 제과업체인 모리나가에서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형태처럼 ‘여성이 마음에 둔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는 개념을 도입, 이것이 지금처럼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이벤트로 설레는 이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이또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런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 의사는 항소를 하지 않은 채 그 결과를 수용합니다. 법정에서 일제와 이또의 범죄 행각을 세계에 폭로하며 저항했던 안 의사는 왜 항소와 상고 등 남은 재판 절차를 포기하고 사형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
바로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 그 답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손수 아들이 죽으면 입는 수의를 지은 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 전문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879년에 태어나 1910년생을 마친, 그래서 만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대한민국의 영웅, 도마 안중근. 그리고 그 안 의사의 어머니가 이 글을 쓰며 흘렸을 피눈물을 생각하며 오늘의 애국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안중근 의사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42일 후인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합니다. 그리고 그날 안 의사는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백범 선생이 만든 효창원, 그러나... 국립묘지가 아닌...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언은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조국이 해방된 후 백범 김구 선생님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숨져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옮겨와 용산 효창원에 안장합니다. 그리고 백방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범은 훗날 자신마저 죽게되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을 후손들이 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고심 끝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효창원에 만들었습니다. 가짜 묘를 두고 언젠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그곳에 안장하라는 의미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효창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습니다.
하지만 1949년 6월 26일 백범 선생님마저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되어 돌아가신후 대한민국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고사하고 그 분들이 안장된 효창원을 국립묘지로 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효창원은 국가보훈부가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용산구청이 1년에 한번 벌초해 주는 것으로 예우를 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 바꾸고자 지난 19대 국회 당시 효창원을 국립묘지로 지정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이를 반대하는 이기주의적 청원 등으로 법안 논의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포기하지 말아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은 절대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2025년 오늘부터 다시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준비했습니다. 또한 효창원은 반드시 국립묘지로 승격되어야 합니다. 효창원 국립묘지 승격은 우리들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은, 아는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고 또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국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리해 주십시오.
안중근 의사, 그 분의 이름을 자꾸 자꾸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