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손잡이를 아래로 돌려 회색빛 철문을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보면 오직 나만 아는 우주가 펼쳐진다. 내가 만든 세상, 내가 살아가는 공간, 집이라는 우주. 그곳에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공존한다. 한마디로 시공간의 경계가 사라진 무중력의 세상에서 나는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9평 남짓 되는 이 작은 우주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헝클어진 옷, 씽크대에 놓인 그릇들, 켜켜이 쌓인 책들 사이사이에는 확실히 이 곳만의 룰이 존재한다. 아침보다는 저녁에 환기를 시킬것, 신발은 세개까지만 나와있게 할 것, 다른건 몰라도 침구는 정리하고 외출할 것. 아주 사소해보이지만, 이 작은 규칙들로 인해 이 곳의 우주는 오늘도 별탈없이 돌아가고 있다.
언제 봄이 왔었나 싶게 초록의 잎들이 여름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요즘, 나는 새로운 우주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새로 가게될 우주에게, 나는 몇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 첫째, 그곳의 우주는 지금의 우주보다 창을 활짝 열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둘째, 지금은 침실과 거실과 주방이 모두 한 공간에 있지만, 새로 가게 될 그곳에는 주방이 조금은 다른 공간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생전 처음으로 요리라는 것에 도전해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곳은 월세가 아닌 전세였으면 좋겠다.
지난 몇년동안 나는 언젠가 결혼을 하겠지, 그때가 되면 근사한 둘만의 우주를 만들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일을 유보해왔다. 월세에서 전세로 바꾸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고, 일단 지금의 공간에서 조금만 버텨보자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간을 이어왔다. 길게 보고 내린 결정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왔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 짧은 생각이 또 있었을까 싶다. 당장 내일, 아니 몇시간 후의 일도 가늠할 수 없는데, 올지도 안올 희미한 미래에 대비하는 꼴이었다니. 이건 애초부터 글러먹은 발상이었던게 틀림없다.
이제곧 7월이면 지금의 우주 계약 기간이 끝난다. 이번에는 꼭 지금까지 미뤄두었던 나만의 신상 우주를 구축해볼 생각이다. 물론 새 우주의 지분에는 은행이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할 예정이다.
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는 월세로, 누군가는 전세로, 누군가는 그 어렵다는 자가로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우주를 꾸려나간다. 누군가는 가족 또는 연인, 친구와 함께, 또 누군가는 혼자서 각자의 우주를 살고 있다. 그곳이 계약서에 0이 몇개붙은 우주이든, 그곳을 누구와 함께 채워나가든 아무렴 어떠랴. 집이라는 우주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모두는 가장 온전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그래서 이 지구라는 별에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나만의 우주에서 가장 나다운 시간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