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계란이 되는 현상

진심은 바위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를...

by SOJEONG

회사라는 곳에서 힘든 건 일이 아니다. 일이야 어떻게든 한다. 밤을 새우든, 주말을 껴 넣든, 몸이 먼저 움직인다. 그런데 버거운 건 따로 있다. 내가 던진 말이 허공에서 사라질 때다. 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을 때, 메신저가 ‘읽음’으로 바뀌고도 아무 말이 없을 때, 회의에서 내 문장이 공중에 뜬 채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때. 그때부터 사람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애쓰게 된다. 바로 현재 시점에서의 나의 모습이다.


회사에 다니는 게 참 지치고 버겁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걸 알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던진다. 계란이 바위를 깰 수 없다 하더라도, 바위가 조금이라도 움직였으면 했다. 고개를 돌려주기만 해도 됐다. “알겠다”, “지금은 어렵다”, “이건 싫다”, “이건 더 듣고 싶다” 같은 말 한마디. 그런데 돌아오는 건 침묵이다. 응답 없는 침묵은 내 마음을 점점 더 큰 빈 공간으로 만들어간다.


처음에는 설렘이 있었다. 어렵고 힘들어도 회사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기대감이 있었다. 변화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같이 변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가장 우선순위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을 수습하기에 바쁘다. 수습이라는 말은 편리하다. 수습이라는 단어, 그저 바쁘다는 말 하나면, 그 뒤에 오는 모든 문장이 잠깐 멈춘다. “일단 지금은…”이라는 말로 내일을 쉽게 밀어낸다. 틀린 건 아니다. 당장 무너지는 걸 막아야 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장’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당장이고, 늘 지금이고, 늘 급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계속 바뀌지 않는 곳을 향해 돌을 던진다.


사람마다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도 맞다. 그걸 알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꾸 내 마음이 다친다. 내가 바란 건 거대한 합의가 아니라 최소한의 응답이었다. 내 말에 대한 동의나 박수까지는 필요 없다. 다만 내 말이 누군가의 손에 닿았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아무도 받지 않는 공을 계속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진다. 기다리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이 사람을 갉아먹는다.


나는 그저 이 회사에 새로운 사업거리를 만들기 위한 사람이던가. 오직 그것밖에는 없던가. 나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순간이 싫다. 너무 비참해서. 하지만 마음이 계속 그쪽으로 기운다. 누군가의 무반응 속에서, 나는 자꾸 내 쓸모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는지 묻지 못하고, 내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로 나를 확인한다. 그게 더 안전한 질문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그런 질문은 답이 나와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공허해진다.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건 팀원들과의 간격이다. 개발부서와 현장 적용 부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니까. 그래서 팀원들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했다. 자부심을 가지고 추진하자고. 답변을 기다리며 멈춰 서 있기보다 먼저 치고 나가자고. 나는 분명 추진력을 말했고, 움츠러들지 말자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번역된 것 같다. “다른 부서와의 협의는 필요 없다”, “협의는 쓸데없는 짓이다”라는 쪽으로. 내가 말한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내 문장은 그렇게 굴러갔다.


오해는 늘 늦게 온다. 그 순간에는 잘 몰라서 더 잔인하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 달라진 걸 느끼고도,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는데도, 내가 무슨 단어를 잘못 썼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불을 끄고, 누워서야 문장이 다시 들린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은 말이 더 크게 들린다. “협의는 필요하다”라는 문장을 왜 덧붙이지 못했지. “혼자 가자는 뜻이 아니다”라는 말은 왜 그 자리에서 못 했지. 그렇게 나는 밤마다 내 말을 되감기 한다. 그리고 결국 죄책감으로 끝난다. 내가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리더십이 있을까. 리더십이란 말은 참 무겁다. 사람을 이끄는 힘, 방향을 만드는 힘, 책임지는 힘. 나는 책임지고 싶은데, 내 말이 왜곡되는 걸 막지 못한다. 팀원들이 오해한 걸 보면, 내가 리더가 아니라 방아쇠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팀원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불필요한 갈등의 씨앗을 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푹 꺼진다. 내가 누구에게 화가 나는지도 헷갈린다. 팀원들에게 인지, 다른 부서에게 인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지, 아니면 그렇게 말한 나 자신에게 인지.


그럼에도 회사가 정말 성장하길 바란다. 이 말은 여전히 진심이다. 그런데 갈수록 무기력한 나 자신을 진심이라는 말로 위로하기 바쁘다. 진심은 회의 자료의 표에 들어가지 않는다. 진심은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다. 진심은 늘 내 안에서만 웅성거린다. 그리고 그 웅성거림이 점점 초라해진다. 진심이 커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진심이 나를 앞으로 밀었는데, 이제는 진심이 나를 달래는 붕대가 되고 반창고가 된다. “그래도 나는 진심이었어.” 그 말로 내가 무기력해진 이유를 덮으려 한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서글픈 위로다. 깃발이 붕대가 되는 순간은 대개 오래 버틴 사람에게 온다.


무기력은 게으름에서 오지 않는다.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서 온다. 너무 오래 “조금만 더”를 반복한 사람에게서 말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닫혀 있다. 사람들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고, 대화하자고 먼저 나서는 것도 점점 싫어진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늙어버리는 기분이다. 말을 꺼내면 또 침묵이 돌아올까 봐. 또 내 속만 헛헛해질까 봐. 그래서 나는 점점 조용해진다. 조용해지면서 더 예민해진다. 예민해지면서 더 지친다. 그렇게 마음은 작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돈다.


생각해 보면 일은 실패해도 끝이 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적어도 ‘끝났다’는 감각은 남는다. 그런데 무반응은 끝이 없다. 끝이 없어서 사람을 갉아먹는다. 아무도 “싫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혹시 내가 더 설명하면…”을 떠올린다. 아무도 “좋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혹시 내가 덜 설득력 있었나…”를 떠올린다. 응답이 없으니, 나는 혼자서 모든 가능성을 다 끌어안는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커지는데, 그 커짐은 자신감이 아니라 불안이다.


나는 회사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 마음이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소진시키는 쪽으로 자꾸만 기운다. 설렘으로 시작했던 문장들이 점점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다시 무기력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무기력 위에 나는 ‘진심’이라는 붕대를 감싼다. “나는 진심이었으니까.” “나는 그래도 잘하려고 했으니까.”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내일이 오지 않는다. 위로는 되지만 길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제는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그리고 그걸 바꾸기 위해 내가 어디까지를 감당할 수 있는가. 회사의 성장이라는 말은 크다. 너무 커서 자주 사람을 집어삼킨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나를 갈아 넣고, 그 갈림을 또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진짜 성장이 아니라, 성장을 말하는 사람으로만 남게 된다. 그게 두렵다.


그래서 요즘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회사 전체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한 칸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닿을 수 있는 사람,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가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속도. 어쩌면 그 정도가 내가 무너지지 않고 갈 수 있는 성장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여전히 변화가 좋다. 다만 변화가 나를 부수는 방식으로는 더는 하고 싶지 않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회사에서의 내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어디까지를 견뎌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다만 누군가의 침묵이 내 존재를 정의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던진 말이 공중에서 사라진다 해도, 내가 그 말까지 함께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 적어도 그 사실만은 지금의 내가 붙잡고 있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계란을 들고 바위 앞에 선다. 던질지 말지 망설인다. 던지면 깨질 걸 알면서도, 손을 내려놓지 못한다. 회사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만으로 나를 달래는 데에만 바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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