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발음은 내 오랜 아킬레스건이었다. 영어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는 방법으로 외고에 진학한 내가 구수한 토종 한국식 발음을 구사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딱히 발음에 대한 교정을 해 주지도 않았고, 솔직히 발음 좀 못해도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문제만 잘 풀면 되지. 솔직히 영어로 말하기를 할 일도 별로 없었다. 물론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이 조금은 있었지만 반대로 나만큼 일본어를 하는 친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학교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영어로 팀플을 해야 한다니?
우리 학교에서는 무조건 10개 이상의 전공강의를 영어로 듣도록 하고 있다. 단순히 수업을 영어로 듣는 것은 교수님들도 콩글리쉬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하시고, 굳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문제를 충분히 풀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팀플이다. 내 전공이 경영이다 보니 대부분의 수업이 팀을 짜서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영어로 토론을 하거나 발표를 해야 한다.
영어를 못하니 일단 주눅이 든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모인 학교다 보니 나보다 영어 못하는 사람을 찾기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진배없었다. 'WHAT? WHAT?'을 남발해가면서 힘겹게 어떻게든 해냈지만, 영어를 못하는 게 너무 눈치 보이고 서럽기도했다. 그래도 영어공부를 따로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영어를 못한다는 의식이 너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8월, CPA 2차 시험 직후의 나는 인생 포기한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었다. 영어공부나 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8분 정도 길이의 테드 강의를 정해서 일주일에 하나씩 쉐도잉을 하긴 했는데, 솔직히 도움이 별로 안 되었다. 일단 재미가 없었고, 그냥 달달 외우기 식이라 얼마 안 가니 전부 까먹었다. 제대로 하지 않기도 했고. 그러던 중 2차 시험 결과가 나왔고, 솔직히 다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상황에서 응시하지 않은 감사를 제외한 모든 과목이 합격점을 넘었다. 그 순간 내 눈에는 생기가 돌아왔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 회계사도 영어 잘하면 좋다던데. 이 기회에 영어공부나 제대로 해 볼까?
기초부터 시작하기
이왕 하는 김에 뿌리부터 뒤집어엎자는 마인드로 영어 발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발음기호 읽는 법을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좋은 영상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Bridge TV에서 제공하는 강의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밥을 먹으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발음 관련 영상을 열심히 시청하면서 따라 했다. 구분하지 못하던 r, l 발음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th 발음뿐 아니라 모든 발음들을 새로 교정했다. 단어 발음뿐 아니라 한국어와는 다른 영어의 강세, 즉 어디에 강세를 주고 어디에 주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강의가 있어서 이것도 열심히 들었는데 정말 유익했다.
개구리알 영어스쿨이라는 채널에서는 발음 법칙에 대한 강의를 시청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상하게 발음하고 있던 영어 단어가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Clothes와 Monthes에서 th 소리가 나지 않는다던지, Edge에서 d가 묵음으로 처리된다던지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 윤배영 리스닝 아카데미라는 채널에서는 실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표현들을 소개하고 있다. 실전에서 발음이 어떤 식으로 변하고, 왜 우리가 못 알아듣는지를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이 강의들을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휴대폰에 저장해서 대중교통을 타거나 운동을 할 때마다 계속 들었다. 다양한 표현을 접하고 발음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쉐도잉에 낚이다.
영어공부법에 대해 찾아보다 보니 쉐도잉을 극찬하는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원어민의 발음을 따라 해 가면서, 적절한 상황에서 어떤 표현이 사용되는지 까지 익힐 수 있는 쉐도잉은 내가 보기에도 정말 좋은 공부법 같았다. 해외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던 친구와 함께 쉐도잉 스터디를 하기로 하고, 꽤나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인턴을 쉐도잉 하기로 했다.
영어 쉐도잉 채널. 라푼젤, 겨울왕국, 프렌즈 등 다양한 영상으로 쉐도잉을 훈련할 수 있다.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쉐도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들을 편집해놓은 영어 쉐도잉이라는 채널이 있어서 유용하게 써먹었다. 영상은 총 #1251으로 나뉘어 있었고, 한 달 만에 끝내기 위해 하루에 40개씩 하기로 했다. 쉐도잉을 하다 보니 확실히 평소라면 절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던 표현들을 비교적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표현을 익히는 데 있어서는 쉐도잉만 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은 Can I take a rain check? 밖에 머리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지만.
하지만 스터디를 함께 하던 친구는 중간 정도에서 쉐도잉에 회의감을 느끼고 탈주했다. 나는 이때까지도 쉐도잉 예찬론자였기 때문에 '그럼 내가 쉐도잉의 우수성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과 함께 드라마 슈츠, 리키 저 베이스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등을 인턴에 이어서 시도했다. 그리고 곧 나도 탈주했다.
일단 발음이 안 들린다.
인턴까지는 괜찮았는데, 영화보다 조금 더 말이 빠르고 어려워지는 드라마나 완전 현장감으로 가득한 스탠드업 코미디로 쉐도잉을 하고자 하니 발음을 따라 하려고 해도 들리지 않고, 따라 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묵음처리가 쏟아지고, 단어와 단어가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연음 현상은 내 고막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소리가 바로바로 들리지 않다 보니, 같은 부분을 몇 번씩 반복하게 되고, 짧은 시간의 영상을 쉐도잉 하는 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서 너무 피곤했다.
너무 지루했다.
보통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을 하나 정해서 그것 하나만 반복하도록 하는데, 나는 좋아하는 영어 시각매체가 당시에 딱히 없어서(뭘 봐도 재미가 없는 시기였다.) 금방 지치고 금방 지루해졌다. 더 이상 장기적으로 쉐도잉을 진행할 동력을 상실했다. 나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쉐도잉은 아니구나...
영어 원서 읽기, 내 발음을 180도 바꿔준 비법.
쉐도잉 다음으로는 영어 원서 읽기가 인기가 많아 보였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소리 내면서 읽기. 솔직히 살면서 읽어본 영어 원서라고는 고등학교 시절 읽은 The Giver와 Holes가 다라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당시의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정신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도전하기로 했다. 나는 따로 책을 구매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취미가 취미인 만큼 해외의 웹소설을 읽기로 했다.
나는 취미로 웹소설을 종종 읽었는데, 그중에는 외국의 웹소설을 번역한 것들도 있었다. 나는 곧장 구글링으로 해외의 웹소설이 연재되는 사이트를 찾았다. 다양한 사이트가 있지만, 가장 편리한 사이트는 로열로드였다.
해외의 웹소설은 모든 내용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후원금으로 돈을 벌거나, 출판 전까지 무료로 제공하다가 출판 후 작품을 내리는 것 같았다. 20화 정도까지만 무료로 제공한 후 이후에는 돈을 줘야만 읽을 수 있는 한국의 결제 시스템과는 달랐다. 공짜로 글을 읽을 수 있다니... 원서 읽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이 어디 있을까? 나는 인기 순위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 곧바로 읽기를 시작했다.
로열 로드의 TOP3 작품들. 배움의 어머니는 3000페이지나 된다. 사실 나도 반 밖에 못 읽었다
내가 본 작품은 Re : Trailer Trash와 Super Minion, Mother of Learning이다. 마지막 작품은 배움의 어머니라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무료로 볼 수 있다. 아주 재미있다. 강추.
단어의 발음을 들어보고 따라 하기
소설을 보다 보면 모르는 단어가 아주 쏟아진다.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한편에 100개가 넘는 모르는 단어가 쏟아져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첫 작품을 잘못 고른 것도 있고(현지의 문화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나 표현들이 너무 많았고, Urban dictionary에서나 찾을 수 있는 슬랭들이 너무 많았다.), 원서 읽기가 거의 처음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 같다. 모르는 단어는 네이버 사전이 아니라 영영사전들을 통해서 발음을 듣고 뜻을 찾았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은 워드 파일이나 엑셀로 정리해서 블로그에 꼬박꼬박 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뜻은 그냥 한국어로 정리해 두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긴 한다. 사전은 주로 케임브리지나 맥밀란 사전, 그리고 어번 딕셔너리를 주로 이용했다. 사전마다 나오는 뜻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뜻풀이가 없으면 다른 사전에 다시 검색했다.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까지 하나하나 발음을 찾아가면서, 정말로 하루 종일, 최소 하루 5시간에서 심하면 10시간까지 내 목소리를 녹음해가면서 계속 소설을 읽었다. 수업시간에도 수업은 안 듣고 소설만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발음이 조금씩 개선되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거의 두 달을 웹소설에 파묻혀 살았다.
두 작품을 읽은 뒤에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원서로 구매해서,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다. 이때는 항상 따라 읽지는 않았고 가끔씩 따라 해 가면서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극적인 웹소설에 찌들어진 나는 2권까지 읽는 것이 한계였다.
이렇게 긴 시간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단어의 발음이 반복 훈련되었고, 낯선 단어를 보아도 발음을 대강 유추할 수 있는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정된 발음이 입에 달라붙었다. 영어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곧 오픽 공부를 시작했고, 학교 기말고사 기간이었던 약 2주 동안의 준비 뒤 나는 오픽 최고점인 AL을 받을 수 있었다. 곧 시작된 겨울 계절학기는 성적에서 팀플의 비중이 40%나 되는 영어강의였는데, 역시나 영어로 발표를 해야 했다. 원래의 나였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발표를 피했겠지만, 이번에는 자신감 있게 영어 발표를 해냈다. 항상 내 발음을 놀리던 동기 형도 내 발표 연습을 듣고는 '이제 영어공부 좀 한 애 같네'라는 극찬을 내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웹소설 읽기가 가장 좋았던 점은, 즐거웠다는 거다. 나에게 웹소설 읽기는 공부가 아니라 즐거운 독서 시간이었다. 읽고 싶은 만큼 읽고 나면 5시간이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출처가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어 공부는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웹소설 읽기는 이런 점에서 나한테 딱 맞는 공부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드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쉐도잉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언어학자 스티븐 크라센 교수
언어 학습 분야의 권위자인 스티븐 크라센 교수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을 읽으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서도 자신에게 재미있는 책을.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웹소설 읽기가 정말 좋은 영어공부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여러분! 영어 웹소설이 이렇게 좋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 영어 발음이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억양의 문제도 있고, 원어민들의 발음은 또 다르니까.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영어 듣기에 어려움을 느낀다. 여전히 자막 없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토크쇼를 보면 자막을 켜고 들어도 왜 발음이 이렇게 되는지 의아한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보상은 자신감이었다.
단순히 나도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넘어, 반평생을 포기하고 살았던 영어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원래 외국인이 말을 걸면 덜덜 떨며 뒷걸음치던 내가, 계절학기에서 홍콩대의 학생들과 팀플을 하고, 메신저로 대화를 하고, 한 멤버와는 친구를 먹어서 인스타 맞팔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비즈니스 영어토론 수업을 신청했는데... 여기는 또 다른 세계다. 왜 이렇게 들리지가 않는지. 말은 할 수 있는데 들리지가 않으니 나는 여전히 토템 신세다... 이제는 영어 듣기를 단련할 시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