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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참고래 Mar 30. 2021

달천철장

동네 산책로

먼 곳을 많이 봐줘야 눈이 멀쩡해진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집이 저층인 것을 슬퍼하게 되었다. 먼 산을 보고 싶어도 사방이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다. 언젠가는 고층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기억의 궁전]

익숙한 장소에 여러 포인트를 두고, 기억하고 싶은 사물을 각 포인트와 연결 지어 두면, 그 장소를 연상할 때마다 그 사물들을 순서대로 떠올릴 수 있다.



1. 올라가는 길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달천철장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언덕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애들은 하굣길에 아무 생각 없이 언덕에 올라갔다가 그냥 바로 내려왔다. 진짜 아무것도 없고 풀만 무성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중학생들이 언덕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조용했다. 

아무것도 없어서 별 일 없었나 보다.


2. 올라가는 길 2

내가 대학생이 된 뒤로 이것저것 많은 시도가 있었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때도 공원을 만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유물이 나왔겠지.


3. 밤에 오면 견주들이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더라.

그 이후로 재미도 감동도 없는 옹기축제 이야기보다는 쇠부리축제 이야기가 많아졌다. 

쇠부리 축제도 뭐 특별한 게 있겠냐만은. 초등학생 때 쇠부리축제에서 풍선으로 이것저것 만들던 자원봉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손톱 사이에서 피가 났었다. 

어라? 그때 이미 유적이 있었던 건가?


4. 한 번은 통화하면서 걷다가 넘어졌었다.

공원의 모습은 매번 바뀐다. 재작년 까지만 해도 공원의 형태를 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걷는 길만 있고, 나머지는 허허벌판이었다. 벤치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이제는 제법 공원이라고 할 만한 느낌이다. 벤치도 많고, 화장실도 있고, 이것 저것 잘 꾸며놓았다.


5. 난간

한 번은, 고등학교 친구의 군 입대 직전에 차를 렌트해서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주차장이 있는 걸 모르고 다른 곳에 주차하고 걸어왔었지. 그때 당시만 해도 많이 허전했는데 짧은 기간 동안 많이 변했구나 싶다.


6. 주차장도 있다.

마트에서 닭강정을 사서 벤치에 모여 앉아 먹었었다. 새우튀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워낙 맛있어서 열심히 먹었던게 기억이 난다.


7. 삼한시대 변진의 철 산업 중심지였다고 한다.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는 분이 있을 법도 한데. 평소 이 시간대에 오면 점심시간에 공원을 걷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진다. 

고양이도 없고, 비둘기도 없다. 다 어디 갔지.


8. 여기서도 강아지랑 산책 오신 어르신이 앉아 계신 걸 자주 볼 수 있다.

매일같이 노트북 화면이랑 책만 보다 보니 눈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난시도 조금 좋아진 것 같다.


9. 화장실. 여기서 친구가 다리 낫게 해 주면 군대 갈 거냐고 물어봤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안구건조증이 아닌 것 같은데. 병원을 아무리 다녀도 받는 약만 늘어났었다.

약값만 매번 10만 원 가까이 나왔었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 돈으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갔다면 눈이 좀 좋아졌을지도.


10. 눈부시다.

공원 산책 후에는 비즈니스 영어 수업을 들었다. 켜 놓고 딴짓만 했지만. 수업 종료 전 20분 동안은 어김없이 Team Discussion 시간이다. 오늘은 곧 있을 팀 토론 평가 이전에 주제를 정하는 시간을 주셨다. 3명이 한국인이고 1명이 외국인이었다. 영어로 간단한 자기소개 후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11. 지도

나는 세부적인 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다. 단어를 모르는 게 아닌데, 들리지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하고 있으려니 가장 적극적인 분께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니 나도 말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못 듣는 동안에 따로 검색해놓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니 어느 정도는 만족하신 것 같았다. 수행평가 때도 똑같은 상황일 것 같아 걱정이 된다.


12. 여기서 닭강정을 먹었었다.

지금은 678교시 연강인 국제재무관리 수업을 듣고 있다. 역시 영강이다. 너무 졸리다.


13. 여긴 뭐하는 곳 일까. 밤에 오면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기억의 궁전은 내 자취방, 자취방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 집에 있는 내 방, 친구 자취방, 학교 열람실, 외할머니댁 정도다. 한번 쓴 장소는 다시 쓰려고 할 때 이전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경우가 자꾸 생겨서 새 궁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14. 구충당 이의립 선생. 평생 광산을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뭘 먹고 사신 걸까.

집 밖으로 돌아다니는 게 귀찮아 생각만 하고 있다가, 최근 눈 건강을 위해 돌아다니는 김에 기억의 궁전을 새로 개척해두기로 했다. 어디에 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15. 저 구멍에 들어가 본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기억의 궁전은 보통 규칙 없이 긴 리스트를 외워야 할 때 쓰고 있다. 지금 내 방은 '감사인이 동시에 수행할 수 없는 비감사업무'를 기억하는 데 쓰고 있다. 책장에 있는 책에 펜이 박혀 있고(재무제표 작성 업무), 책상 위에 닭이 한 마리 있고(보험계리업무), 의자 위에 스패너가 하나 있고(재무보고체계 설계 업무), 피아노 앞에 브로커가 앉아 있고(자금 조달 중개 업무) 이런 식이다. 주변에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보던데, 은근 효과적이다.


16. 벤치

기억의 궁전으로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는 게 목표였는데, 최근 의욕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서 포기했었다. 한번 포기하고 나니 다시 할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17. 스피커? 여기서 음악이 나오던데.

간단하게 기억의 궁전을 쓰고 싶다면 신체를 이용할 수 있다. 머리 위에 뭐가 있고, 양 손목에 뭐가 있고, 주머니에 뭐가 있고, 발목에 뭐가 있고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그려두면, 기억해둔 걸 떠올리고 싶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한번 스캔하면 된다. 그럼 기억해둔 게 떠오른다.


내려가는 길은 중복.

서울에 돌아가기 전에 태화강공원이나 울산대공원에 들려서 사진을 많이 찍어둬야겠다. 

궁전을 최대한 많이 지어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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