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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참고래 Apr 07. 2021

양압기 쓰기 귀찮다.

D - 80, 공부를 안 했다.

비행 중 소음이 커서 코를 골아도 눈치가 안 보인다.

오늘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자취방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대학교 동기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집에 도착해서 조금 게으름을 피우다가 방 정리를 하고 나니 11시다. 공부는 내일 하도록 하자. 그런데 내 타이머 친구가 안 보인다. 어디 갔지. 새로 사야 하나?




나는 어릴 때부터 비만이었다. 비만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부터 코를 골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통학을 했으니 코골이를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증세가 심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부터 코골이는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코골이는 내 생각보다 심했고, 좁은 기숙사에서 내 코골이를 감당해야하는 룸메이트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번은 참다 못한 룸메이트가 담임 선생님께 내 코골이 문제를 상담했고, 그 선생님은 나를 자습실 외에 아무것도 없는 6층에 혼자 격리한다는 해결책을 가지고 오셨다. 


다행히 흐지부지되었지만. 


솔직히 많이 민폐였다. 어느 정도 적응한 룸메이트들도 심심하면 새벽에 베개를 던졌다. 베개를 맞고 나면 소리가 작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베개를 맞은 기억이 없다. 맞고서도 잠에서 안 깼다는 이야기겠지. 이때부터 양압기를 썼었다면 피해가 덜 갔을 텐데, 아쉽게도 이때는 양압기 대여가 지금처럼 편리하지는 않았다.


룸메이트들의 고통과 함께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학교 기숙사 생활에서는 별다른 트러블이 없었다.  기숙사에서 내가 최고참이라서 별 말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코를 덜 골았던 걸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아마 전자겠지. 이후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할 때는 혼자서 평화롭게 잘 지냈다. 신경 쓸 사람이 없으니까.


문제는 작년 여름 때부터였다. 이때는 CPA 2차 시험을 응시한 직후라 본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자꾸 새벽에 깼다. 다시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오고, 가위에 자주 눌렸다. 낮잠을 자도 가위에 눌렸다.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1~2주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니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무호흡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비인후과를 찾아갔고, 수면다원검사를 받았다. 


아주 당연하게도 수면무호흡을 진단받았다. 심각도는 중간 정도. 나이에 비하면 심한 편이다. 처음에는 코골이 수술을 받을까 했는데(의사 선생님이 매우 열성적으로 권하셨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코골이 수술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어 양압기를 처방받기로 했다. 수면다원검사를 하면서 알레르기 검사도 받았는데, 여기서 내가 우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도 잘 먹고 있는데 말이다. 검사 결과가 잘못된게 아닐까?




양압기는 코에 마스크를 고정시키는 형태였다. 수면 중 입을 벌리면 공기가 입으로 새어 나와 잠에서 깨기 때문에,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자야 한다. 처음에는 테이프 때문에 입 근처에 상처도 나고 여러모로 불편했다. 이제는 적응했지만. 


양압기를 처방받은 직후에는 적응기간이라는 게 있다. 3개월 중 1개월 동안 하루 평균 6시간 이상 양압기를 사용해야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다. 듣자 하니 처방받은 사람의 절반은 적응하지 못하고 포기한다고 한다. 나도 처음 2주는 너무 불편해서 새벽에 무의식적으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잤다. 자던 중에 테이프가 떨어지는 경우에도 반사적으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잤다. 


그래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적응이 되었다. 나중에는 양압기를 끼면 바로 잠드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양압기를 낀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수면 루틴이 된 것 같았다. 특히 늦게 자거나 하면 잠을 자기가 힘들었는데, 양압기를 끼니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잠이 잘 왔다. 


적응기간은 성공적으로 끝냈고, 지금은 평균 2시간을 꾸준히 착용해주면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다. 이제 양압기는 어딜 가든 떼 놓을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친구 집에서 잠시 지낼 때도 양압기를 들고 가고, 어딜 몇 박으로 놀러 간다고 치면 양압기를 챙겨가야 한다. 크기가 작은 게 아니라서 상당히 번거롭다. 그래도 어쩌겠어, 피해 안 주려면 써야지. 




최근 양압기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 번 끼지 않고 잤는데, 옆방에 피해를 준 것 같다. 아침에 옆방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취방이 방음이 너무 안된다. 불 끄고 키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수준이니. 고시원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양압기를 꼭 끼고 자야겠다. 뭔가 내 방에서 마음대로 코도 못 곤다는 게 너무 답답하다. 다음에는 방음이 더 잘 되는 곳에서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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