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살면서 10번 남짓 되는 수술을 경험했다.
발목, 무릎, 어깨, 팔을 수술했다. 모두 골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었고, 항상 전신마취를 했다. 남들은 한 번도 겪어보기 힘든 전신마취를 나는 10번이나 했다. 그렇다고 이걸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이런 나의 특이사항을 아는 주변인도 많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잘 이야기를 안 하고 다녔으니까. 최근에는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그냥 뭐, 오래 알았으니 이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
나는 건망증이 워낙 심해서, 자꾸 뭘 까먹으면 전신마취 탓을 하고는 한다. 진짜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머리는 좋은 편이니까, 상관없을지도. 아니면 사실 나는 엄청난 천재인데 전신마취가 내 천재성을 조기에 박멸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 망상이다 망상.
첫 수술은 초등학교 때였다. 초등학교 5학년. 아마 그때쯤으로 기억한다. 기억이 많이 희미하다. 하도 많이 해서 각각의 수술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수술 전에는 자주 엑스레이를 찍으러 병원에 다녔다. 집에서 차로 50분 정도 걸리는 병원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서울 아산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이때부터 수술을 고려하기 시작했던 걸까?
첫 수술은 양다리를 동시에 했다. 서울아산병원이었다. 당시에 걷다 보면 종종 종양에 인대가 걸려서 다리가 안 펴졌다. 쉬다 보면 다시 멀쩡해졌다. 그때 나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딱히 절망한다던가 우울하다던가 그랬던 기억은 없다. 어렸을 땐 단순했나 봐. 아니면 그냥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지도.
이때 수술한 곳은 왼쪽 다리는 무릎 왼쪽 아래. 오른쪽 다리는 무릎 뒤편이다. 걷는데 방해가 되었던 곳은 오른쪽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수술이란 걸 했고, 당연히 전신마취도 처음 했다. 전신마취를 하기 위해서는 굵은 관이 필요해서, 보통 맞는 링거 주사보다 두꺼운 수술 주사를 팔에 꼽아둔다. 그런데 내가 워낙 과체중이다 보니, 간호사들이 혈관을 못 찾아서 여러 번씩 꼽는 일이 잦았다. 진짜 너무 아팠다. 몇 번 실패하고 난 후에는 윗사람을 데려오는데, 그분들은 한 번에 꼽아주고 가셨다. 나를 가지고 실습을 한 건가 싶었다.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해야 하지 않나요. 왜 잘하시는 분 내버려두고..
막 무슨 전신마취 이후에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하는 글들을 어딘가에서 봤던 것 같은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 본 적도 있는데, 별 감흥이 없더라. 음, 의료시스템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던 건가 싶다.
개인적으로 수술 후에 정말 힘들었던 순간은 수술 직후였다. 가장 힘든 건 수술 첫날밤. 마취에서 깨어난 직후에 엑스레이를 촬영하는데, 워낙 대형병원이다 보니 내 앞에도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진을 찍기 위해 한참을 대기해야 했다. 이 시간이 겁나 힘들고 답답했다.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힘들고 아프고 답답한데 나를 촬영장비 위로 옮겨서 자세를 바꿔가면서 사진을 찍는게 참 힘들었다. 수술할 때마다 이 순간이 정말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수술 후 입원기간에 통증은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진통제를 강한 걸 썼었나 보다. 대신 밤만 되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뻐근하고, 약간의 열감과, 약간의 통증.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정말 컸던 것 같다. 정확히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면서 어머니께 소리를 질러댔던 건 기억난다. 왜 그렇게 오버했을까. 정말 죄송하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곧 간호사가 와서 진통 주사를 놓아줬다. 주사를 맞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는 자주 맞으면 안 좋다고 조금 난처해했던 것 같다. 마약성이니까. 솔직히 약간 중독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약쟁이였구나. 싹수가 아주 노랬네.
병원에서는 걷지도 못하고, 당연히 화장실도 못 갔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더라.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는데. 휴대폰으로 게임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TV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병실의 풍경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입원한 기억이 워낙 많다 보니. 항상 6인실이었기 때문에 기억 별로 병실의 형태는 비슷한데 내 병상의 위치가 다 다르다. 아마 이때는 오른쪽에서 가장 문에 가까운 병상이었던 것 같다. 같은 병실에 계시는 분들은 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들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어린이병동에 입원했었나? 병실은 성인 병동인데 진료는 어린이병동에서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글을 쓰다 보니 병실에서 만났던 인연이 한 명 떠올랐다. 선천적으로 무릎이 돌아가 있어서 조금씩 돌리는 수술을 하는 친구였는데. 이 친구와 닌텐도 DS로 포켓몬을 하면서 놀았던 게 기억났다. 이때가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닌텐도 DS는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는데. 첫 수술에서도 닌텐도 DS를 가지고 놀았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아마 아닐 것 같다. 휴대폰으로 열심히 모바일 게임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첫 수술이 아니면 굳이 모바일 게임을 했을까 싶다.
집에는 앰뷸런스를 타고 돌아왔다. 한 번에 50만 원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 울산으로 편하게 바로 왔다. 집에서는 열심히 기어 다녔다. 이때는 정말 맘 편하게 잘 살았던 것 같다. 화장실 가는 게 힘들다는 것만 빼면. 어머니는 출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집에 자주 함께 계셨다. 그것 말고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난 뭘 하고 지냈더라. 컴퓨터로 게임이나 했겠지 뭐.
못 걸은 지 한 달 가까이 되다 보니 걸어야 할 때가 되어도 걷는 법이 기억이 안 나는 느낌이었다. 다리에 하중이 실리는 느낌이 정말 생소했다. 개인적으로 약간 재밌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발을 내딛는 경험에서 약간의 쾌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뒤로는 한동안 목발을 짚고 학교를 다녔다. 급식시간에는 나를 담당해주는 친구가 밥을 받아다 줬다. 그 친구와 자주 싸웠던 게 기억이 난다. 싸운 뒤에도 밥을 받아다 주던 그 친구..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친구였던 것 같다.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다. 중학교 때 한번 마주쳐서 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것도 첫 수술의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다. 금식 후에 처음으로 나온 식사가 미음이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진짜. 나는 그래서 미음이 엄청 맛있는 음식인 줄 알았다. 달고 고소하고. 그래서 그 뒤로 미음을 한번 더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맛없었다. 그냥 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음, 글을 어떻게 마쳐야 할지 모르겠다. 내 브런치를 읽는 지인들이 너무 많아져서, 이 글은 오래 못 걸어둘 것 같다. 적당히 있다가 내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