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77, CPA 준비생 동지를 만났다.
날이 밝은 탓에 9시에 일어났다. 침착맨의 원소전 영상을 틀어놓고 10시까지 누워있었다. 오늘은 12시에 CPA 2차 시험을 준비하는 후배와의 점심 약속이 있다. 12시까지 설거지를 하고 방을 청소했다. 후배와 밥을 먹고 중앙광장 열람실에서 10시까지 공부했다. 늦게 잔 탓에 계속 피곤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힘으로 견뎌냈다. 앞글자를 복습하는데 3시간 반이 걸렸고, 빈칸 목차를 3단원까지 읽는데 2시간을 투자했다.
13000원을 들여 목차와 빈칸 목차를 제본했다. 이제야 공부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GS 모의고사 전까진 앞글자 복습과 목차 공부를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서울에 올라오기 직전인 2월 말 즈음, 2학년 때 잠시 교류했던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지는 자신이 이번에 1차 시험에 턱걸이로 합격하게 될 것 같은데, 2차 시험공부에 대해서 조언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늘 그랬듯 자기 자랑을 곁들인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해 줬고, 서울에 올라가면 한 번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연락이 왔을 때에는 내가 본가에 내려가 있어 만나지 못했고, 내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면 연락을 주기로 했다. 그렇게 만나기로 한지 1달이 지난 오늘 점심에 약속이 잡혔다.
인쇄소에 들려 목차를 제본한 후에 돈가스집 앞에서 후배를 기다렸다. 2학년 때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거의 4년 만의 만남이었다. 4년 만에 만난 녀석은 조금 늙어있었다. 군대를 다녀왔으니, 그리고 전역한 후에도 계속해서 공부만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걸까. 후배는 나더러 군대 다녀오기 전에 비해서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했다. 나더러 동안이란다. 1학년 때는 노안 소리 들었었는데.. 기분이 좋았다.
듣자 하니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도 많이 빠졌다고 한다. 몸짓 하나하나에서 뿌리 깊은 피로와 스트레스가 느껴졌다. 나름 자신감 넘치는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수험기간 동안 자신감을 많이 잃은 것 같았다. 1차 수험기간에서 충분한 실력을 쌓아놓지 못했다는 생각과, 지금 남들보다 진도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에서 많이 고통받고 있는 것 같았다. 1차 시험에 한 번에 합격했다는 점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는 친구인데 참. 아무래도 엄청 대단한 사람들만 눈에 띄다 보니 괜히 주눅이 든 것 같았다. 도저히 4과목을 가져갈 자신이 없어 세법을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2과목만이라도 합격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나는 잘 결정했다고 말해주었다. 자신의 상태는 자기가 제일 잘 알 테니까.
돈가스는 맛있었고, 나는 전화로 이미 말해줬던 이야기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는 반쯤 시험을 포기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투입으로 운 좋게 합격한 사람이라 내 이야기들이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렇게 공부한 나도 붙었으니 나보다 열심히 하는 너는 충분히 붙고도 남는다는 응원뿐이었다. 돈가스를 먹고 난 후에는 커피를 하나씩 들고 학교 중앙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후배들 사이에서는 CPA 열풍이 불고 있다고 했다. 남자만 쳐도 20명이 넘는 사람이 CPA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여자 후배들은 이미 많은 친구들이 시도했다가 떠나갔다고. 그중 한 명이 이번 1차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우리 기수에서는 우리 반이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는 이야기도 했다. 얘네들은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에서 얻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반과 폭넓게 교류하는 친구가 수집한 정보라고 했다.
후배놈들이 웃긴 게, 나는 내 1차 점수와 2차 결과를 같이 준비한 친구 말고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아는 후배가 별로 없는데 다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했다. 기분이 참 오묘했다. CPA를 준비한 선배들의 인적사항은 거의 다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이 녀석들은 정말 CPA에 진심인 것 같다. 약간 부럽기도 했다. 내가 시작할 때는 같이 준비하는 사람이 2명밖에 없었는데. 다 같이 으쌰 으쌰 하면서 공부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 그리고 하는 말이 나더러 자기들의 롤모델이란다. 하하. 지금의 내 상황이 그들이 보기에 상당히 이상적이었나 보다. 덕분에 크게 웃었다. 기분도 약간 좋아졌다. 그래. 나도 열심히 했어. 조금 많이 게을러서 그렇지.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이라.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다.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얼마이든지 간에, 참 듣기 좋은 말인 것 같다.
커피를 다 마시고 중앙광장 지하 열람실에서 같이 공부를 했다. 이 열람실은 처음 써봤는데, 나쁘진 않았다. 지하라서 창문이 없는 게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내일도 아침에 만나서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만나서 같이 공부할 것 같다. 친한 친구 컬렉션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주 좋아. 참 기분 좋은 하루였다. 앞으로도 오늘만 같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