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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Jan 17. 2019

젠트리피케이션 프레임에서 지역발전 프레임으로

최근 들어 골목길과 동네가 언론에 부쩍 많이 등장한다.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한국경제 ‘우리 동네 어떤 밸류', 아세아경 ‘한국의 골목길’ 등. 언론이 과거에 골목길을 문화나 여행 기사로 다뤘다면, 지금은 경제, 산업 등 보다 넓은 시각으로 접근한다. 골목길이 이제 주류 문화로 진입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골목길이 서브컬처를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왜 골목길일까? 골목길 부상은 전 세계적으로 과도한 세계화와 중앙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확산되는 로컬주의(Localism)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도 로컬 지향 트렌드에 예외가 아니다. 로컬은 현재 골목길뿐만 아니라 귀농귀촌, 제주 이민, 고향 귀환, 동네 소비, 핫플레이스, 로컬 맛집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더 크게는 탈물질주의의 부상에 주목해야 한다. 1970년대 이후 선진국들은 물질적 성공, 신분, 경쟁, 성실을 추구하는 물질주의 문화에서 개성, 다양성, 삶의 질,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탈물질주의로 전환했다.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 ‘아날로그의 반격’ ‘오래된 미래’ ‘생태 경제학’ ‘지속 가능한 발전’이 탈물질주의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에 주체적, 심미적, 독립적 소비를 지향하는 탈물질주의자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골목길과 골목상권을 찾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부상한 골목상권은 동네와 골목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골목상권 없이 강북의 홍대, 삼청동, 이태원이 강남에 버금가는 상권으로, 지역 원도심인 전주 한옥마을, 대구 김광석길, 광주 양림동, 부산 전포카페거리가 관광지로 발전한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골목상권의 기여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골목상권의 미래가 밝다고 단정할 수 없다. 비단 어려운 경제적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심각한 장애물은 대중보다 편협한 시각으로 골목상권을 대하는 지식인 사회의 인식이다.

한편에서는 골목상권의 강자-약자 구도에 집착하고, 또 한편에서는 이를 유행으로 치부하거나 단기에 부양할 수 있는 투자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주민에게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하고, 창의적인 소상공인이 혁신적인 생활산업을 창업하는 골목상권의 육성 방안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지식인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골목상권도 정부가 임의적으로 활성화하기 어려움을 보여준 이화51번가 상점가와 신촌 박스케워 사업



골목상권 인식의 프레임 젠트리피케이션


골목상권의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프레임(Frame)과 관련이 있다. 현재 골목상권을 논의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프레임은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임대료 상승을 감당하지 못한 소상공인과 예술가가 내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탈물질주의 성격의 골목상권이 처음 들어섰고 젠트리피케이션도 제일 먼저 경험한 홍대는 예술가와 시민단체가 활동한 지역이었다. 홍대 변화의 현장을 체험하고 목격한 예술가들은 홍대 상권의 ‘활성화’로 인해 홍대 문화의 기반을 다진 예술가와 독립 상점이 떠나는 현실을 비판했고, 그 원인을 단기 이익을 좇는 부동산 업계와 자본의 ‘탐욕’에서 찾았다.


당시 홍대의 활동가와 예술가들이 선택한 프레임은 사회학과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이다. 서구 도시에서 유래된 젠트리피케이션은 임대료와 주택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기존 거주자가 고소득층 이주민에 의해 터전에서 밀려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주택이 아닌 상업시설의 임차인이 교체되는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서민 주거지의 고급화를 의미한 고전적인 젠트리피케이션과는 거리가 멀지만, 서구 도시 수준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가 이처럼 홍대에서 처음 등장해 골목상권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프레임으로 자리잡았다. 젠트리피케이션 논리가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분야로는 사회학, 도시학, 대중문화학, 그리고 언론사의 문화부와 사회부를 꼽을 수 있다.



골목형 쇼핑센터로 골목상권에 진입하는 부동산개발사



정책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부동산 업계


젠트리피케이션 방법론자들이 비판하고 그들과 정반대 되는 입장을 가진 그룹이 부동산 업계와 상업시설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리테일 업계다. 부동산 투자 입장에서 보면, 골목상권은 고수익을 낼 수 있는 자산이다. 높은 수익률을 실현하기 위해 골목길 자산에 투자하고 이에 적합한 사업자를 선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투자로 인해 교체되는 상인이나 예술가의 사정은 일차적인 고려 대상이 아니다


골목상권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인식한 부동산 업계는 젠트리피케이션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하게’ 골목상권에 투자하는 성향을 보인다. 부동산 산업의 동향을 추적하는 언론의 부동산부와 유통부도 젠트리피케이션을 언급하지 않고 상권과 시장분석, 수익률 전망 중심으로 뉴스를 생산하고 전달한다.


부동산 업계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결과, 골목상권 정책 논의는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중심으로 진행됐고, 정부도 임대기간 연장, 임대료 인상 제한, 권리금 보호 등 임대인 규제에 집중했다. 2018년 국회가 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해, 임대보장 기간을 10년으로 늘리고 계약 기간 중 임대료 인상을 5% 이하로 제한하는 등 임차권을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강화했다.


정부가 임대료 억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강북 중심부 골목상권의 성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골목상권 임대료도 2016년을 기점으로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압구정동, 가로수길 등 일부 상권에서는 임대료가 하락한다는 뉴스도 들렸다.



2018년에 등장한 최저임금 프레임


그런데 2018년 골목상권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자영업 위기론이 증폭된 것이다. 2013-2015년 젠트리피케이션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한 홍대와 이태원에서도 불황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프레임이 최저임금이다. 골목상권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자, 언론이 최저임금에서 골목상권 위기의 원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노사관계를 다루는 경제부가 최저임금과 골목상권의 관계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


임대료가 하락세로 돌아서고 주요 골목상권의 공실률이 높아지는 것을 감안할 때 젠트리피케이션이 다시 골목상권을 위협할 가능성은 낮다. 임대인에게 불리한 시장 상황을 무시하고 임대료를 함부로 올릴 수 있는 임대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임대차 시장이 '포스트 젠트리피케이션'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골목상인 입장에서 보면 기존 프레임만족스러운 처방을 내놓지 못한다. 젠트리피케이션 논리는 임대료 규제(와 대기업 진입 억제), 최저임금 논리는 인건비 인하만을 대안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존 논리와 더불어 재료비, 디지털 전환, 공간과 서비스 디자인  골목상인의 경영 성과에 미치는 다른 요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나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활성화가 시급한 지역발전 프레임


젠트리피케이션, 부동산, 최저임금 논리를 대체해야 할 프레임은 지역발전이다. 상권의 일부 문제만 분석하는 기존 프레임은 상권 전체의 발전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지역발전 프레임은 우리 사회가 원하는 골목상권은 어떤 상권이며, 이에 필요한 물적, 문화적 기반이 무엇이고, 이런 조건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시작된다. 지역경제 차원에서 상권에 접근해야 상인과 건물주 외의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이익을 고려한 균형적인 대안을 도출할 수 있다.


지역발전 관점에서 골목상권 용어의 재정의도 필요하다. 골목상권은 현재 영세 상인이 활동하는 근린상권, 프랜차이즈와 독립 상점이 경쟁하는 먹자골목, 그리고 젊은 층이 선호하는 ‘여행 가는’ 골목상권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지역발전 수준에 따라 생활상권, 문화지구, 여행상권(일반적으로 알려진 골목상권), 창조산업단지로 분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생활상권은 주민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일반적인 근린상권이다. 문화지구에는 상업시설과 더불어 문화예술 시설이 집중돼 있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한다. 여행상권은 주민뿐만 아니라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는 상업지역을 말한다. 2000년대 중반 뜬 골목상권이 여행상권 범주에 속한다. 홍대, 성수동, 이태원 등 골목상권 중 골목상권을 기반으로 창조산업을 유치한 상권이 창조산업단지다.


상권 성격에 따라 정부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생활상권에서는 지역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중요하다면, 여행상권과 창조산업단지에서는 외부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과 상업시설의  대외 경쟁력이 중요하다.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의 차등화도 중요하다. 젠트리피케이션, 특히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가 성장하고 소비자 선호 변함에 따라 일부 생활상권과 문화지구가 여행상권과 창조산업단지로 '발전'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노력은 생활 인프라가 중요한 생활상권과 상업화가 문화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는 문화지구를 중심으로 세심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중에서도 문화지구에 대한 접근방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서울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1970년대 동숭동, 신촌, 1980년대 인사동, 1990년대 홍대 등 대중문화 중심지가 수시로 바뀌는 현상을 경험했다. 이제부터라도 지구단위계획과 공공재 투자를 통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화지구의 특색을 살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경쟁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과도한 상업화’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골목상권은 전화위복의 기회다. 로컬 지향 시대의 새로운 동력으로 골목상권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올바른 이해와 발전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진영논리에 기반한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된다면, 골목상권이 창출하는 지역발전 기회뿐만 아니라 2000년대 중반 이후 겨우 되살린 골목문화 자체를 상실할 수 있다. 잘못된 정책으로 쇠락한 골목상권은 결국 재개발의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P.S. <골목길 자본론>은 지속 가능한 골목상권 모델장인 공동체를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으로 지역 특성에 맞는 업종에 특화된 장인 대학과 장인 기획사의 육성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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