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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종말?

by 골목길 경제학자

선비의 종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에즈라 클라인은 최근 마틴 구리와의 인터뷰에서 미디어 이론 관점에서 현대 정치와 엘리트의 위기를 토론했다. 마틴 구리는 전 CIA 미디어 분석가이자 『The Revolt of the Public』(2014)의 저자로, 디지털 혁명이 정치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분석해 왔다. 그의 책은 도널드 트럼프가 첫 대선에서 승리한 2016년 실리콘밸리에서 트럼프 현상을 예측한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구리는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정보 환경의 급변이 정치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설명했다. 그는 과거 정보가 희소했던 시대에서 무한히 풍부해진 시대로 전환되면서 기존 엘리트와 기관들의 신뢰가 붕괴했다고 주장한다.


https://www.nytimes.com/2025/02/25/opinion/ezra-klein-podcast-martin-gurri.html


클라인이 이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던진 질문은 "오늘날의 엘리트는 20년 전보다 나빠졌는가?"였다. 이는 엘리트의 가치와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구리는 이 질문에 미디어 이론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엘리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실제로 미디어 적응력 측면에서 "특별히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디지털 정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투명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구리의 분석이다.


구리는 케네디나 레이건과 같은 과거 지도자들이 당시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환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활용했던 것과 달리, 현대 엘리트들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작동 방식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디지털 혁명이 일으킨 "정보 쓰나미"가 기존 제도의 모든 결함과 실패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으며, 이것이 전통적 권위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정보 환경의 변화가 미디어, 정부, 학계, 기업 등 모든 주요 제도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촉발했고, 결과적으로 트럼프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의 부상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 구리의 주장이다.


반면 클라인은 구리의 미디어 중심적 분석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신뢰 붕괴의 원인이 단순히 정보환경의 변화만이 아닌 엘리트 계층 자체의 질적 저하에 있을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클라인의 관점에서는, 엘리트가 단순히 미디어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현재 그들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는 문제의 본질이 기술적 적응력보다는 엘리트의 가치관과 공익에 대한 헌신에 있다는 클라인의 시각을 반영한다.


두 가지 관점: 가치의 문제인가, 미디어의 문제인가

클라인과 구리의 대화는 현대 엘리트 위기의 원인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시각을 보여준다. 이 논의를 명확히 하기 위해, 먼저 몇 가지 핵심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에는 두 가지 유형의 엘리트가 존재한다. '공익적 엘리트'는 전통적 엘리트로, 제도권 교육을 통해 형성된 전문성, 공공선에 대한 헌신, 장기적 안목, 그리고 신중한 판단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정파적 엘리트'는 대중과의 정서적 연결,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 개인적 카리스마, 그리고 즉각적인 감정적 호소를 특징으로 한다.


엘리트는 또한 소통 방식으로도 구분된다. '중앙집중적 소통'은 전통적 방식으로, 권위 있는 매체를 통한 하향식, 일방향적 정보 전달을 의미한다. 이 방식은 정보의 희소성과 게이트키핑을 전제로 한다. 반면 '네트워크형 소통'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탈중심적, 쌍방향적, 즉각적인 정보 교환을 의미한다. 정보의 과잉과 개방성이 이 방식의 특징이다.


이러한 틀로 클라인과 구리의 대화를 해석하면, 클라인은 공익적 엘리트의 약화라는 가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게 있어 핵심은 오늘날의 엘리트들이 공공선보다 정파적 이익에 집중하고, 책임보다 특권에 집착하며, 장기적 비전보다 단기적 인기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암묵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도덕적, 윤리적 변질이 신뢰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제시한다.


반면 구리는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 이론에 기반한 관점에서 현상을 해석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반쯤은 맥루한주의자"라고 묘사하며,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이 다른 모든 것의 상류에 위치한다"는 맥루한의 통찰을 인용한다.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 "미디어가 메시지다"에 따르면, 소통의 내용보다 소통의 매체가 사회를 더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구리에게 있어 핵심은 중앙집중적 소통에서 네트워크형 소통으로의 전환이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정보 환경의 급변은 공익적 엘리트들의 중앙집중적 소통 방식을 근본적으로 무력화했다. 과거의 엘리트들은 중앙집중적 소통 구조 속에서 메시지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현대의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서는 그러한 통제가 불가능하다.


두 시각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클라인이 공익적 엘리트들의 가치 쇠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구리는 소통 환경의 변화와 그에 대한 엘리트들의 적응 실패를 강조한다. 이는 해결책에 대한 접근도 달라지게 한다. 클라인의 관점에서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 회복이 필요한 반면, 구리의 관점에서는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 맞는 새로운 소통 전략의 개발이 필요하다.


미국 정치 지형에 적용된 두 관점

이 두 관점의 차이는 현대 미국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바마와 바이든은 모두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를 공유했지만, 소통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오바마는 클라인이 지적했듯이 "제도에 거리를 두면서도"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공공 봉사 정신과 지적 엄밀함이라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소셜 미디어와 같은 네트워크형 소통 플랫폼에 능숙하게 적응했다.


반면 바이든은 오바마와 유사한 가치관을 가졌지만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인터뷰에서 구리가 바이든 행정부를 "20세기로 돌아가려는 충동"을 가진 집단으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소통 적응 실패를 의미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1958년 뉴욕타임스와 같은 중앙집중적 소통 환경을 이상적으로 여기며,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을 통제하려 했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경우, 부시나 롬니와 같은 전통적 엘리트들이 트럼프와 같은 다른 유형의 리더십에 주도권을 넘겨준 상황이다. 트럼프는 전통적 엘리트가 중시하는 가치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취했지만,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했다. 구리는 트럼프를 "트위터의 베토벤"이라고 표현하며, 그가 공익적 엘리트들이 적응하지 못한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트럼프는 전통적 정치인들과 달리 자신의 모든 면을 대중에게 드러내는 전략을 택했는데, 구리는 이를 "모든 해골을 거실에 진열해 두는" 접근법이라 표현하며 투명성이 요구되는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이러한 현상은 포퓰리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구리가 인터뷰에서 설명했듯이,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은 "임의의 어떤 것이든 반대하는" 대중의 힘을 강화시켰다. 기존 제도와 공익적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그들을 "무너뜨리고", "개혁하고", "제거하겠다"는 포퓰리스트 메시지가 더 강력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구리의 분석은 현대 정치에서 두 요소의 통합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오바마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와 네트워크형 소통 능력을 모두 갖춤으로써 성공했지만, 바이든은 후자가 부족했다. 진정한 지도자는 공공선에 대한 헌신이라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와 네트워크형 소통 능력을 모두 갖출 필요가 있다.


한국 상황: 더 심각한 선비의 종말

이 논의를 한국에 적용하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선비의 종말'이다. 한국의 공익적 엘리트 집단에서도 공익 정신의 상실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때 한국 사회를 이끌었던 지식인, 관료, 기업인들이 보여주었던 공공선에 대한 헌신, 자기희생, 그리고 장기적 안목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엘리트주의를 '공동체 자유주의'로 표현한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가치관으로, 한국의 선비 정신과 서구의 공익적 엘리트가 공유하는 핵심 가치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집단주의적' 공동체주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며, 공공선과 개인의 자유 모두를 중시한다.


더욱이 한국은 미국보다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의 영향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보급률과 스마트폰 사용률은 구리가 설명한 "정보 쓰나미"의 효과를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한국 정치는 팬덤 정치, 포퓰리즘, 정체성 정치의 형태로 급속히 변형되었다.


팬덤 정치는 정치인들을 정책이나 이념의 담지자가 아닌 연예인처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현상이다. 포퓰리즘은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화하고 '엘리트 대 서민'의 구도로 재구성하는 정치 스타일이다. 정체성 정치는 정책보다는 세대, 지역, 성별 등 특정 집단의 정체성에 호소하는 정치 전략이다. 이 세 가지 현상은 모두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와 중앙집중적 소통 방식이 무너지고,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 최적화된 포퓰리스트 정치가 부상한 결과다.


그렇다고 한국 엘리트들이 네트워크형 소통을 마스터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랜 시간 중앙집중적 소통에 익숙해진 한국의 전통적 엘리트들은 소셜 미디어의 쌍방향 소통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디지털 환경을 여전히 하향식 정보 전달의 장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네트워크형 소통의 본질—즉각성, 투명성, 상호작용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존의 중앙집중적 메시지를 디지털 플랫폼에 단순히 옮겨놓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정치적 의제를 선점하는 동안, 공익적 엘리트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공공선보다 정파적 이익을, 국가의 미래보다 다음 선거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구리가 말한 "신뢰의 붕괴"는 한국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에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기관에 대한 깊은 불신은 이러한 '선비의 종말'과 인터넷 정치의 확산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정보환경에 맞는 선비정신의 부활

현 상황의 해법은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공익적 엘리트의 복원에 있다.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해석된 선비정신이 필요하다. 이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공공선, 장기적 안목, 도덕적 책임감, 지적 엄밀함)를 유지하면서도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오바마의 사례는 이러한 균형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를 체화하면서도 네트워크형 소통 방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선비정신의 현대적 재해석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 능숙하면서도 공공선을 잊지 않는 지식인, 디지털 소통에 적응하면서도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를 지키는 지도자들이다.


이는 단순히 소통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소통의 통합이다. 정파적 엘리트들이 보여주는 네트워크형 소통 능력과 공익적 엘리트들이 지켜온 공공 가치를 결합하는 새로운 엘리트상이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의 선비는 트위터(현 X)에 능숙하면서도 공익을 추구하고, 유튜브를 활용하면서도 지적 책임을 다하며,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서 소통하면서도 장기적 안목을 잃지 않는 지도자여야 한다.


결국 선비의 종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이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 붕괴를 가속화했지만, 동시에 그 가치를 새롭게 구현할 가능성도 제공한다. 선비정신의 현대적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파편화된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공동체를 재건하는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클라인과 구리의 대화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선비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와 네트워크형 소통 능력, 전통과 혁신을 모두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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