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도시의 재발견

by 골목길 경제학자

부르주아 도시의 재발견


나는 이번 베를린 방문에서 의도하지 않게 베를린의 숨겨진 정체성,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부를 경험했다. 비텐베르크플라츠에서 숙박하고 달렘에서 강연한 덕분이다. 베를린의 서남부인 이 지역은 독일 부르주아지의 자부심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논할 때, 다수의 관찰자들은 크로이츠베르크의 힙스터 문화, 뮤지엄 인젤(Museum Insel)의 역사적 유물, 혹은 과거 동독 시절의 흔적에 주목한다. 그러나 베를린의 또 다른 정체성인 부르주아 문화는 종종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도시 공간 구조에서 보헤미안 지구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부르주아 지구가 존재한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르주아 전통이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20세기 초 유럽 사회 회고록 '어제의 세계'(1944)에서 세기말 베를린을 계급이 엄격히 구분된 사회로 묘사했다. 이러한 강한 계급의식은 독일이 경제적·문화적으로 후발 발전국가(Late Developer)였던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늦게 산업화와 근대화를 시작한 독일은 이러한 후발성을 극복하기 위해 더 강력하고 체계적인 부르주아 구조를 발전시켰고, 이는 명확한 계급 구분과 부르주아 문화의 공고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산업화 배경과 함께, 한자동맹(13-17세기)의 상인 정신, 루터의 종교개혁이 확립한 합리주의적 사고, 그리고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자연관이 서로 어우러져 독일만의 독특한 부르주아 문화를 형성했다. 이 부르주아 문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한 곳이 바로 독일 근대화의 중심지였던 베를린, 특히 부르주아 계급이 선호했던 남서부 지역이었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 묘사한 것처럼, 독일 부르주아 문화는 단순한 부의 과시가 아닌 사회적 책임감과 합리적 실용주의,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한국에서 부르주아라는 개념이 종종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것과 달리, 베를린에서 만난 부르주아 문화는 더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오늘날에도 이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베를린 도착

2025년 4월 23일, 호스트가 추천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 아침 거리로 나섰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카데베(KaDeWe)’ 백화점과 ‘쿠담(Ku’damm)’ 거리였다. 전날 밤엔 미처 보지 못한 이 사인들이 ‘베를린의 강남’이라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납득하게 해주었다. 호스트가 비텐베르크플라츠를 추천하며 “한국 사람들에게 반응이 좋은 지역”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비텐베르크플라츠(Wittenbergplatz)역은 단순한 지하철역이 아니다. 역 내부 벽면을 따라 펼쳐진 오래된 광고 포스터들—지멘스 전기기차, 오펠 자동차, 담배와 초콜릿, 백화점과 카페까지—는 20세기 초 베를린의 산업과 소비, 그리고 도시의 자부심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벽화다.


이 광고들은 강렬한 색감과 대담한 구도, 아르누보와 초기 모더니즘의 흔적이 가득하다. 지금 보면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 디자인들은, 과거 베를린이 품었던 산업과 소비의 낙관주의를 담은 시각적 선언 같았다. 역에서 바로 연결되는 카데베 백화점은 1907년부터 베를린 소비사회를 대표해 온 상징이고, 거리 너머 쿠담(Kurfürstendamm)은 여전히 쇼핑과 도시문화의 중심지로 활기를 띠고 있다.


베를린은 스스로를 ‘무전통의 도시’로 여긴다. 전통을 내세우기에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아픈 기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도시는 종종 벨 에포크(1871~1914) 시대와 1920년대 베를린을 가장 자랑스러웠던 시기로 회상한다. 벨 에포크는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베를린이 세계도시로 성장하던 시기였고, 1920년대는 짧지만 자유와 창조의 에너지가 넘쳤던 문화적 황금기였다. 역의 벽면과 거리 풍경 곳곳에 이 시기를 기념하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를린의 부르주아 도시 샤를로텐부르크의 역사

비텐베르크플랏츠는 베를린 남서부에 분포한 부르주아 지구의 중심, 샤를로텐부르크의 초입이다. 이 지구의 역사는 프로이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센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즉위 전에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내 조피 샤를로테의 명에 따라, 요한 아르놀트 네링이 1695년에 착공한 샤를로텐부르크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 궁전을 중심으로 발전한 샤를로텐부르크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베를린의 중산층과 상류층이 선호하는 주거지로 발전했다.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정원으로 유명한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부르주아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현재도 이 지역은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과 편리한 교통, 다양한 문화시설을 갖추고 있어 베를린의 부유층이 선호하는 주거와 상업지역이다.


19세기부터 베를린의 계급별 주거지역 구분이 뚜렷해졌다. 19세기 중반, 베를린이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노동자 계층은 동북부 공장지대 근처에 모여 살았고, 부르주아 계층은 남서부 지역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주거 패턴은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베를린의 남서부 지역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부르주아 도시의 전형, 달렘과 그루네발트

베를린의 부르주아 도시는 상업 중심지인 샤를로텐부르크를 기점으로 남서쪽으로 확장된다. 베를린에 오래 거주한 한국인에게 “베를린의 청담동이 어디냐”고 물으면, 종종 ‘달렘(Dahlem)’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실제로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강의하는 친구도 달렘을 그렇게 표현했다.


달렘은 베를린 남서부, 슈테글리츠-첼렌도르프 자치구에 속한 지역으로, 베를린자유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학문적 분위기와 더불어 고급 주택가로도 유명하며, “도심의 분주함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주거지”로 여겨진다. 특히 43헥타르 규모의 달렘 식물원은 이 지역의 자연적 매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달렘과 인접한 그루네발트(Grunewald)는 베를린 부유층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주거지다. 1884년 숲 인근에서 택지 개발이 시작된 이 지역은, ‘그루네발트(녹색 숲)’라는 이름 그대로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다. 도시 내부에 있으면서도 자연과 긴밀히 연결된 이곳은, 삶의 질과 환경적 가치를 중시하는 부르주아적 이상을 공간적으로 구현한 곳이다.


두 지역 모두 과거 베를린 분단 시기에는 서베를린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서방 진영의 자유와 풍요, 교양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학자, 외교관, 상류층이 선호하는 주거지로 남아 있으며, 조용한 주택가, 뛰어난 교육 인프라, 그리고 녹지와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독특한 도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미군 주둔과 베를린 남서부의 변화

베를린 남서부 지역의 부르주아적 특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의 주둔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1945년 베를린이 분할 점령되면서 미국은 주로 남서부 지역인 첼렌도르프, 슈테글리츠, 달렘 등을 관할했다. 특히 달렘에는 미군 본부와 미국인 거주지가 들어섰고, 클레이-알레(Clay Allee)와 같은 대로는 미국 첫 베를린 군정사령관 루시우스 클레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미군의 주둔은 이 지역에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인 장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PX(Post Exchange), 미국식 식당과 상점들이 들어섰고, 이는 차츰 베를린 시민들에게도 개방되었다. 특히 냉전 시대 분단된 베를린에서 미군의 존재는 자유와 풍요의 상징이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부르주아적 정체성과 결합했다. 달렘에 위치한 베를린자유대학의 설립(1948년)도 미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동베를린의 훔볼트대학에 대응하는 서방 진영의 학문적 자유를 상징하는 기관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영향은 냉전이 끝난 후에도 이 지역의 분위기에 남아있다. 달렘과 첼렌도르프 일대에서는 여전히 영어 사용이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러한 미국의 영향은 독일의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와 충돌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성취를 중시하는 점에서 오히려 조화롭게 융합되었다. 이는 독일 부르주아 문화가 가진 실용주의적 개방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왜 부르주아 문화가 강한가

독일의 부르주아 문화는 단순한 계층 문화를 넘어, 역사적 경험과 사상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 독특한 생활양식이다. 중세 도시 자치의 전통, 루터교의 윤리관, 낭만주의의 자연관, 그리고 민족주의 시대의 문화적 자부심이 서로 얽혀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이어오고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상인 도시들의 자율적 전통이다. 한자동맹으로 대표되는 북독일 상업도시는 실용주의와 공동체 정신을 결합한 독특한 도시문화를 발달시켰다. '한지아티쉬(Hanseatisch)'라는 말에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책임감 있게 결정을 내리는 태도가 담겨 있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인 정신이 한 가문의 삶과 몰락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루터교의 윤리와 교육관이 결합되면서, 부르주아 문화는 개인의 책임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독일어 성경 번역과 회중 음악의 도입은 언어와 음악, 교육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민 교양문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독일 낭만주의는 자연과의 교감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제시했다. 이는 도시계획과 주거 환경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베를린 남서부의 달렘과 그루네발트처럼, 도심 가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식은 독일 부르주아의 주거 이상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의 문화 운동은 부르주아 계층이 독일적 정체성을 주도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학문과 예술, 음악을 통해 독일의 문화적 우수성을 증명하려 했던 이 시기의 노력은 교육과 문화에 대한 시민의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부르주아 문화의 원형?

베를린에서 만난 부르주아 도시와 문화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가치와 이상이 담긴 생활방식이다. 루터교의 영향으로 강조된 개인의 책임감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민족주의 시대에 확립된 문화적 자부심은 오늘날 독일 부르주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샤를로텐부르크, 달렘, 그루네발트 등에서 만난 부르주아 문화는 사회적 책임과 교양,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개념이다. 베를린에서 부르주아 도시를 재발견하는 일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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